입력 2020.03.16 03:00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0] 민족문화의 파수꾼 홍기문
1935년부터 4년간 학예부장으로 김기림·이원조·박치우 등 함께해
교재 만들어 문자보급운동 앞장
필명 袋山으로 고정란 '소문고' 써
소설가 한설야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으로 투옥됐다가 석방된 1936년 초 경성에 올라와 태평로 조선일보사를 찾았다. 그를 반갑게 맞은 학예부장 홍기문은 "자네 소설 실리기로 됐네"라는 소식을 전했다. 2년 동안 옥중에 있었던 한설야를 걱정한 홍기문의 배려로 그해 2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 그의 대표작 '황혼'이다.
홍기문은 1935년 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조선일보 학예부에는 시인 김기림, 문학평론가 이원조, 철학자 박치우, 해외문학파 함대훈·이헌구, 화가 안석주 등 쟁쟁한 인물이 기자로 일했다. 다른 부서에 근무하던 역사학자 문일평·황의돈, 국어학자 방종현, 시인 백석 등도 지면 제작을 도왔다. 홍기문은 이들을 지휘하고 회사 밖 문인·학자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식민지 조선이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가면서 민간 한글 신문들이 총독부의 극심한 통제를 받던 시절 조선일보 학예면은 '민족문화의 파수꾼'이자 '세계문화로 난 창'이었다. 시인 윤동주가 1938년 4월 연희전문에 입학한 직후부터 정성 들여 스크랩한 144건의 주옥같은 기사를 만든 책임자가 홍기문이었다.
홍기문은 1935년 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조선일보 학예부에는 시인 김기림, 문학평론가 이원조, 철학자 박치우, 해외문학파 함대훈·이헌구, 화가 안석주 등 쟁쟁한 인물이 기자로 일했다. 다른 부서에 근무하던 역사학자 문일평·황의돈, 국어학자 방종현, 시인 백석 등도 지면 제작을 도왔다. 홍기문은 이들을 지휘하고 회사 밖 문인·학자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식민지 조선이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가면서 민간 한글 신문들이 총독부의 극심한 통제를 받던 시절 조선일보 학예면은 '민족문화의 파수꾼'이자 '세계문화로 난 창'이었다. 시인 윤동주가 1938년 4월 연희전문에 입학한 직후부터 정성 들여 스크랩한 144건의 주옥같은 기사를 만든 책임자가 홍기문이었다.
조선일보에 11년간 절찬리에 연재된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장남인 홍기문은 아버지를 도와 신간회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던 1928년 가을 조사부 기자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1930년 무렵 신병으로 퇴사했던 그는 1932년 말 다시 조선일보로 돌아와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근무했다.
홍기문은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동안 국어학을 중심으로 국학(國學)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글을 지면에 발표했다. 논문만 해도 1933년 1월 29일 자부터 23회 연재된 '혼란 중의 철자법, 그 정리의 일안(一案)'을 비롯해서 국어학 12편, 국문학 4편, 국사학 3편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풍속·언어·역사·속담을 소개하는 '잡기장' '소(小)문고'라는 고정란을 싣기도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고서(古書)의 오류를 잡아낼 정도로 고증에 철저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때가 1443년 12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도 그였다. 훗날 저명한 한학자가 된 임창순은 조선일보에 실린 홍기문의 글을 읽고 "야, 이런 것도 있구나라고 감탄했지요"라고 훗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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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문은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동안 국어학을 중심으로 국학(國學)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글을 지면에 발표했다. 논문만 해도 1933년 1월 29일 자부터 23회 연재된 '혼란 중의 철자법, 그 정리의 일안(一案)'을 비롯해서 국어학 12편, 국문학 4편, 국사학 3편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풍속·언어·역사·속담을 소개하는 '잡기장' '소(小)문고'라는 고정란을 싣기도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고서(古書)의 오류를 잡아낼 정도로 고증에 철저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때가 1443년 12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도 그였다. 훗날 저명한 한학자가 된 임창순은 조선일보에 실린 홍기문의 글을 읽고 "야, 이런 것도 있구나라고 감탄했지요"라고 훗날 회고했다.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 7월 30일 자에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국보 70호)이 494년 만에 "경북 어떤 고가(古家)에서 발견돼 시내 모씨(某氏·전형필)의 소유로 돌아갔다"는 기사가 실렸다. 5회에 걸쳐 해설을 쓴 방종현은 자료의 입수와 분석이 홍기문과의 공동노작(共同勞作)이라고 명기했다.
홍기문은 또 1934년 여름 재개된 제2차 문자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29년 시작된 제1차 문자보급운동 때 장지영이 만든 '한글원본'을 증보해서 '문자보급교재'를 만들었고, 전국 각지에 문자보급반을 파견해 그들의 성과를 지면에 담았다. 1938년 조선일보가 거사적인 힘을 기울여 조선향토문화조사사업을 시작하자 중도에 퇴사한 이은상의 뒤를 이어 사업을 주도했다.
홍명희·홍기문 부자(父子)의 박학다식에 매료된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은 이들을 각별히 예우했다. 홍기문은 조선일보를 떠난 뒤 방응 모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경성제대 도서관에 틀어박혀 3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 1945년 광복 후 조선일보로 돌아와 전무이사를 지낸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주저앉은 홍명희를 따라 북으로 갔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대 교수와 사회과학원장을 역임하며 조선왕조실록을 우리말로 옮기는 '리조실록' 완역 작업을 이끌었다.
홍기문은 또 1934년 여름 재개된 제2차 문자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29년 시작된 제1차 문자보급운동 때 장지영이 만든 '한글원본'을 증보해서 '문자보급교재'를 만들었고, 전국 각지에 문자보급반을 파견해 그들의 성과를 지면에 담았다. 1938년 조선일보가 거사적인 힘을 기울여 조선향토문화조사사업을 시작하자 중도에 퇴사한 이은상의 뒤를 이어 사업을 주도했다.
홍명희·홍기문 부자(父子)의 박학다식에 매료된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은 이들을 각별히 예우했다. 홍기문은 조선일보를 떠난 뒤 방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