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세상을 바꾼 건 총·칼 아닌 실과 바늘이었다

최만섭 2020. 2. 15. 10:25

세상을 바꾼 건 총·칼 아닌 실과 바늘이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2.15 03:00

18세기 女복식사 연구한 英 저자
온전히 여성의 일로 여겼던 직물, 산업혁명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
비단 교역·양모 산업 등과 엮어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는지 탐구

총보다 강한 실

총보다 강한 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윌북|440쪽|1만7800원

1925년 10월 28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고대 이집트의 소년 왕 투탕카멘의 미라를 감싸고 있던 리넨 천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포장을 벗기는 작업에 꼬박 8일이 걸렸다. 카터는 미라를 감싸고 있던 리넨을 기껏해야 '따분한 부록' 정도로 간주했다. 카터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의 고고학자들 모두 시신을 감싼 천보다 여러 겹 천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장신구와 부적, 그리고 천 밑에 숨겨져 있던 진기한 향수를 뿌린 몸뚱이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리넨에 강력한 의미, 심지어는 마술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리넨이 있어서 미라가 신성한 것이었다. 리넨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었다. 문화적으로 청결을 상징했으므로, 시체나 조각상을 리넨으로 감싸는 행위에는 불순한 물질을 순수하고 신성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시체에 방부 처리를 하고 천으로 감싸는 동안, 그 시체는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변했다.

영국 저널리스트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18세기 여성 복식사와 무도회를 연구한 저자는 바늘의 눈으로 역사를 본다. 총과 칼이 아닌 실과 직물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여 왔으며, 인류 문명에 기여했는지 살핀다. 섬유는 잘 썩는 물질이라 역사의 기록에 영향을 적게 미쳤을 뿐, 결코 돌·청동·철보다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성이 절대다수인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에 '도자기 시대'나 '아마(亞麻) 시대'가 아닌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이름들을 들으면 금속으로 만든 물건들이 그 시대의 주된 특징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금속은 그저 눈에 가장 잘 띄고 오래 보존되는 물질일 따름이다."(51쪽)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사람들’. 신화에 나오는 아라크네와 아테나 여신의 베짜기 시합을 그렸다. 저자는 “신화와 전설에 옷감 짜기가 많이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여럿이 반복적 노동을 하던 여자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 서로에게 들려주게 된다”고 말한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사람들’. 신화에 나오는 아라크네와 아테나 여신의 베짜기 시합을 그렸다. 저자는 “신화와 전설에 옷감 짜기가 많이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여럿이 반복적 노동을 하던 여자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 서로에게 들려주게 된다”고 말한다. /프라도 미술관 소장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면직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산업혁명이 철이나 석탄과 관련 있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직물도 변화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직물을 더 많이 효율적으로 생산하려는 욕구가 여러 건의 기술혁신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방적·방직기 분야의 기술혁신은 방적공과 방직공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실업자가 된 방직 노동자들은 기계를 때려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저자는 실크로드의 비단 교역, 중세 잉글랜드의 양모 산업, 우주복과 스포츠용 직물의 발명 등 직물과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동시에, 그 뒤에 가려진 여성의 노동을 읽는다. 바느질하거나 옷감 짜는 일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여성의 일로 여겨져 왔다. 일본 태양의 여신은 길쌈을 하고,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바느질을 사랑하기로 유명했다. 저자는 "여성과 직물의 오래된 친족 관계는 축복인 동시에 불행"이라고 말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 '레이스 뜨는 여인'은 레이스 뜨기에 몰입한 여인을 그렸다. 16~17세기 유럽 부유층 옷깃 장식으로 유행한 화려한 레이스는 대개 가장 가난한 계층 사람들이 촛불을 밝혀놓고 한 땀 한 땀 손으로 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이 지불한 레이스 비용은 그 레이스를 만든 사람들에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절대다수가 여성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가내 공방에서 일하던 레이스 직공들이 협회나 길드를 결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 대부분이 필수과목처럼 바느질을 배웠기 때문에 레이스 산업에는 잠재적 노동자층이 아주 두꺼웠고, 그래서 임금이 낮게 유지됐다.

대학원 시절, "옷은 허영을 위한 건데 무엇 때문에 옷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느냐"는 뿌리 깊은 편견을 수시로 접했다는 저자가 이를 깨부수기 위해 분투한 수작(秀作)이다. 옷감에 무늬를
짜 넣듯, 소제목이 바뀔 때마다 직물과 섬유에 관련된 동서고금의 명구(名句)를 엮어 넣은 솜씨도 매끈하다. 뛰어난 묘사력 덕에 쉽게 읽히지만 삽화와 사진이 전혀 없다는 점은 아쉽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천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천이 온몸을 감싸며,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도 수의가 얼굴을 덮는다." 원제 The Golden Thread.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5/20200215000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