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난 어딜 가도 환영을 못 받아… '왜 통보 없이 청소하느냐'는 말도 들어"

최만섭 2019. 12. 23. 22:12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난 어딜 가도 환영을 못 받아… '왜 통보 없이 청소하느냐'는 말도 들어"

조선일보

입력 2019.12.23 03:12

[전국 해안 돌며 쓰레기 2만4800여 포대 주워온 UDT 출신, 조상희씨]

"워낙 시끄러운 정권이라 기사가 넘치겠습니다만… 국민 계몽 차원에서 도움 돼"
"수중 작업 중 샌드 펌프로 오른팔이 빨려들어가면서 손목까지 비틀려 찢겨"

이십 년 전 사건 취재로 알게 된 분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UDT(해군 수중 폭파대) 출신 동지 중 한 사람이 7년여 전 작업 중 오른손 마디를 절단당했지만 그 절망을 딛고서 전국 해안을 돌며 2104일째 혼자서 쓰레기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수거한 쓰레기 양이 2만4800여 포대나 됩니다. 워낙 시끄러운 정권(政權)이라 기사가 넘치겠습니다만, 한번 만나주시면 큰 격려가 되고 국민 계몽 차원에서도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분홍색 오른손은 의수


그렇게 소개받은 조상희(65)씨를 만나러 인천으로 갔다. 전철역에 마중 나온 그를 먼발치에서도 알아봤다. UDT 문양이 들어간 운동모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수하려고 하자, 그는 어색한 듯 왼손을 내밀었다. 연분홍색 오른손은 의수였다.

"2012년 여름 통영 바닷속에서 지름 3m 콘크리트관을 청소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관 내부에 달라붙은 굴, 홍합, 미더덕, 따개비를 긁어낸 뒤 샌드 펌프로 빨아들이는 작업이었습니다. 아차하는 순간 샌드 펌프로 오른쪽 팔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발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었습니다. 내 비명을 듣고 배 위에서 펌프와 연결된 발전기 스위치를 껐습니다. 이미 손목까지 비틀려 찢겨나간 뒤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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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희씨는 “지금까지 나라의 혜택을 받았으니 여생을 쓰레기 줍는 걸로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종도=최보식 기자

그는 수중 용접·절단·폭파·설치 작업을 해온 산업 잠수부였다. 카타르, 스리랑카, 인도, 일본 등 해외 현장에서도 4년간 일했다. 천안함 폭침 사건(2010년)이 났을 때는 선체 인양 작업을 위한 해저 용접 요원으로 23일간 투입됐다고 한다.

"갯벌이나 부유물 때문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수중에서 절단이나 해체는 전문성이 필요한 고난도 작업입니다. 산소봉을 연결한 전기 용접기로 하는데 정말 위험합니다. 수중 작업 현장의 내부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까요. 근처에 위험 물질이 있으면 폭발하는 겁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이런 작업을 맡아 바다로 들어갈 때면 '오늘은 괜찮을까' 하며 긴장합니다. 물론 위험 작업이라 수입은 꽤 괜찮았습니다."

―햇수를 계산해보니 사고가 난 것은 산업 잠수부를 한 지 35년이 됐을 때이군요.

"이쪽 바닥에서는 성실하고 실력 있다고 소문나 일감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고라는 게 순간이니까요. 지금까지 몸뚱아리로 벌어먹고 살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좌절했지요. 그러나 일이 벌어졌는데 울고불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만 바보 되는 거지요. 부분 마취를 한 채 수술받는 동안 '기왕에 이렇게 된 이상 남에게 의지 안 하고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손목이 잘렸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병원을 돌아다녔습니다."

고통 잊기 위해 시작한 봉사

―UDT 출신답군요. 지금은 이런 몸에 완전히 익숙해졌습니까?

"지금도 차가운 손목이 달려있는 것 같은 '환상통(幻想痛)'이 너무 심합니다. 낮에는 손목 부위에 핫팩을 감고 있습니다. 온종일 핫팩을 감고 있으면 살이 문드러져 잠잘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밤에는 통증으로 자다가 깨곤 해서 깊은 잠을 못 이룹니다. 제가 봉사라는 걸 시작하게 된 것도 신체적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습니다."

―몸이 아파서 봉사를 시작했다는 뜻인가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모든 의식이 통증에만 쏠립니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며 술만 마시며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고통을 잊기 위해 뭔가 해야 했습니다. 한쪽 손이 없어도 사실 잠수 일을 할 수 있지만 누가 일거리를 주겠습니까. 그래서 봉사를 택한 겁니다."

―그 전에 봉사 활동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사고 전까지는 먹고사느라 바빠 봉사라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석 달 입원해있는 동안 병원 안내 봉사자들을 봤습니다. 초진 온 사람들의 진료 서류 작성을 돕거나 심부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통원 치료를 받으면서 그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동안에는 나 자신의 통증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치료를 끝마친 뒤로 지역 봉사 단체에 가입했다고 했나요?

"어느 날 부산진역 광장에서 봉사 단체 회원들과 함께 급식 봉사를 하고 있는데 'XX도 봉사를 한다'는 비아냥거림이 제 귓전에 들렸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못 들은 척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이벤트처럼 하는 봉사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전국 해안 쓰레기를 치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린 시절 '내 집 앞부터 깨끗하게 치우자'고 했던 새마을운동이 떠올랐거든요."

―왜 해안 쓰레기였습니까?

"제가 군에 입대한 뒤로 바다와 쭉 관계를 맺어왔으니까요. 마구 버린 페트병과 플라스틱이 해양을 오염시킨다는 보도도 봤고요. 저는 부산에서 쓰레기를 줍기 시작해 동해안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뒤 서해안을 돌았습니다. 하루에 포대로 평균 40개 수거합니다. 가장 많이 한 날은 114자루까지 했습니다."

'어디서 미친놈이 왔나'

조상희씨 사진

―작년에는 제주도에서 298일 동안 쓰레기를 주웠다고 했나요?

"셋방을 얻어 머물면서 5903포대를 주웠습니다. 본토박이는 손도 대지 않는 쓰레기를 외지 사람이 수거한 겁니다. 제가 한번 청소해줘봐야 오래 못 갑니다. 동네 주민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겁니다. 일본에서 수중 작업을 할 때 보면 일본인들은 해안에 쓰레기가 떠밀려와 쌓이면 자발적으로 나와 치웁니다. 주인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본받아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 와서 쓰레기를 줍고 있으면 그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봅니까?

"저는 어딜 가도 별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디서 미친놈이 왔나' 하는 식의 취급을 받습니다. 아니면 제가 군청이나 행정복지센터에서 돈을 받고 하는 줄 압니다. 낚시꾼들은 자기 쓰레기를 내게 치우라고 합니다."

―지자체 청소과에서 하는 일을 대신 하고 있는 셈이군요.

"해안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지자체가 나서서 청소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쓰레기를 줍고 난 뒤 '어느 지점은 쓰레기가 상습적으로 버려지는 곳이니 CCTV를 설치하라'고 담당 공무원에게 알려주면 '그런 예산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당신네 공무원들은 한 달에 몇 번 회식한다. 회식 한 번 안 하고 설치하면 안 되겠나'라고 말합니다. 공무원들을 상대해보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공무원들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못 하는 사정이 있겠지요
.

"제가 구청이나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쓰레기 청소를 하려고 하니 포대를 달라'고 하면,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낯선 사람이 와서 청소하느냐'는 말도 듣습니다. 제 돈으로 포대를 사 들고 가서 할 때가 많습니다. 담당 공무원에게 수거한 쓰레기 사진을 보여주고 포대를 달라고 하면 '쓰레기를 수거한다고 미리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이게 지자체의 현실입니다. 언제나 보여주기식 행정을 할 뿐입니다."

―전국을 돌면서 쓰레기를 치우려면 어쨌든 경비가 꽤 들겠습니다.

"지자체에서 쓰레기 자루를 제공해주는 경우를 빼면 다 제 돈으로 합니다. 제주도에서 제가 아침부터 나와 쓰레기 줍는 걸 본 마을 주민이 '시청에 얘기해 한 달에 200만원 받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봉사한다고 해놓고 돈 받고 일하면 이 나이에 사기꾼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고에 대해 얼마간 경제적 보상을 받는 걸 거부할 이유가 없는데요.

"제 UDT 동기생들은 '아파트 공사 현장 경비 일 210만원씩 준다'는 글을 밴드에 올립니다. 저는 이제 돈 받고 일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그냥 돈을 주기 위해 마련한 노인 일자리가 많은데, 노인들이야 정부를 고맙게 여기겠지요. 젊은 사람들은 직장이 없어 놀고 있고…, 결국 자기 자녀와 손주에게 세금 폭탄을 안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나라의 혜택을 받았으니 여생을 쓰레기 줍는 걸로 보답할 작정입니다."

세월호 사고 때 잠수 자원봉사

―제가 보기에 조 선생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라 혜택을 별로 받은 게 없는데요.

"저는 충북 청원군의 시골 출신으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양식이 모자라 보릿겨 빵을 먹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UDT에 자원했습니다. 군에서 3년 잠수 기술을 배운 것이 평생 자산이 됐습니다. 제대한 뒤 곧바로 산업 잠수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밖에 안 나오고 배운 것도 없는데 두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고 다 결혼시켰습니다. 부유하지는 못해도 중간쯤은 살았습니다."

―병역 의무를 했고 그 뒤로는 본인이 열심히 일해서 그런 거지, 그걸 나라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라가 가난했거나 산업화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산업 잠수부를 고용하는 직장이나 일자리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잠수 일을 하면서 요령을 피운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을 잘 해줘야 사장도 이득을 얻고 사장이 이득을 얻어야 일이 계속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그동안 감사패를 30여 개 받았다. 비영리 법인을 설립해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환경 운동 한답시고 박사나 교수들이 고급 호텔에서 세미나를 열면 무얼 합니까.
오랫동안 마구 버리며 살았는데 그게 세미나로 될 일입니까. 현장을 모르고 떠들어대면서 정부 지원금만 받아내려는 거지요."

그는 지금의 몸으로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팽목항에서 18일간 머물면서 두 차례 바닷속을 들어갔다고 한다. 누구처럼 좋은 대학을 안 나오고 높은 자리에도 앉아 본 적 없어 그는 근사한 말은 할 줄 몰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22/20191222015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