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대로 알자

[경제포커스] 정직하고 뻔뻔한 일본과 사는 법

최만섭 2019. 8. 22. 05:40

[경제포커스] 정직하고 뻔뻔한 일본과 사는 법

입력 2019.08.22 03:14

방심하면 日 좋은 일 시키는 운명… '가까워도 멀어도' 곤란한 이웃
여행객만 늘고 연구자는 줄어… 克日 위해선 知日부터 해야

정성진 산업2부장
정성진 산업2부장

10여 년 전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도착한 첫날 회사 선배와 마신 술이 과했다. 인사불성이 돼서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해보니, 지갑이 없었다. 집에 있던 아내를 불러 돈을 냈다. 다음 날 아침, 지갑에 월세로 낼 현금 30만엔(약 300만원)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찔했다. 아내한테는 못 알리고 파출소에 분실 신고를 했다. 기대는 안 했다.

1개월쯤 지나 엽서가 왔다. 지갑을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돈은 몰라도 지갑은 찾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가보니, 돈이 다 있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누가 주워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택시에 방금 놓고 내린 휴대폰도 못 찾은 경우가 있었다.

이 일만 겪었다면 지금도 일본을 좋게만 생각할지 모른다. 다른 면도 봤다. TV에서 1945년 일본 패전 직전 미군이 진행한 도쿄 공습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공습으로 우에노 공원의 동물들이 울부짖고 죽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국인은 자기들한테 징병당해서, 징용당해서 죽었는데, 그들은 동물을 애도하고 있었다. 8월이면 나오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 뉴스에서는 원자폭탄의 잔인함만 강조한다. 그들의 부모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뭘 했는지 TV나 신문에 나온 적이 없다. 자신이 당한 것만 곱씹고 있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다.

정직함과 뻔뻔함 모두 일본의 모습이다. 문제는 열도가 가라앉지 않는 한 일본은 한국 옆에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왜구(倭寇)라고 불리던 일본인의 노략질을 관리해야 했다. 국가 힘이 약했을 때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정말 기분 나쁜 것은 한국 최대의 비극이 일본에 엄청난 기회였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얼마 안 돼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시발점은 1950년 한국전쟁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용 군수물자, 구호물자 상당 부분을 일본에서 생산했다. 1951년 일본의 수출은 2년 전의 2.7배였다. 도쿄 증시 거래액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2월까지 25배로 폭증했다. 거의 모든 제조업이 불처럼 일어나다 보니 이 기간을 부르는 말도 다양하다. 조선(朝鮮) 특수, 가네헨(금속 제품) 경기, 이토헨(섬유) 경기, 삼백(시멘트·비료·종이) 경기 등이다.

우리는 방심하면 일본 좋은 일만 시키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고질병처럼 관리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병을 관리하는 첫 단계는 진단이다. 일본을 진단하려면, 결국 연구해야 한다. 그들의 역사·정치·사회를 잘 알아야, 어떻게 다룰지 처방할 수 있다. 일본어 책도 봐야 하고 일본인도 만나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최근 일본 연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1980년대 말부터 국내 연구소에서 일본을 연구한 한 인사는 "개인적인 일본 연구 모임을 하는데, 요즘은 새 얼굴이 안 보인다"며 "일본 경영서 번역 요청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작년 국내 대학의 일어 전공 졸업생은 7년 전보다 14% 줄었다. 중국어 전공자는 2%, 스페인 전공자는 37% 늘었다. 같은 기간 방일 한국인은 4.5배로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급기야 한일 외교 관계 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민간 경제인끼리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도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한일 상공회의소의 회장단 회의, 한국 전경련과 일본 게이단렌의 한일 재계 회의는 작년엔 안 열렸다. 재계 회의는 올가을 일정을 잡았지만 아직 불안하다.

일본이 싫을수록 더 연구해야 하고 민간 외교도 열심히 해야 한다. 지일(知日) 없이 극일(克日)은 불가능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1/20190821032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