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대로 알자

[강천석 칼럼] 일본 문제 이제 外交가 나설 때

최만섭 2019. 8. 17. 10:11

[강천석 칼럼] 일본 문제 이제 外交가 나설 때

조선일보

입력 2019.08.17 03:17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와 '받아들이기 힘든 역사'가 섞인 게 세계의 현실
일본 문제 너머 국가 最優先 과제에 온 힘 쏟으라

강천석 논설고문
강천석 논설고문

대통령 광복절 연설을 듣고 상당수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엇보다 '죽창'과 '의병'과 '거북선'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연설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듣는 우리 마음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협력의 길로 나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다. 외교로 문제를 풀겠다는 뜻이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경제 보복으로 응수한 일본에 '다른 의도'가 없다면 일본은 대화의 자리로 나와야 한다.

현재의 한·일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과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의 해석 차이에서 비롯됐다. 이 같은 해석 차이는 다시 1910년의 한·일 병합조약의 유효성(有效性)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합조약 5년 전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역사 교과서에서 나온 대로 무장한 일본 헌병과 경찰이 궁궐을 배회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조선 대신을 윽박지르는 분위기 속에 맺어졌다. 병합조약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법무도(不法無道)한 짓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을사조약과 병합조약 사이인 1905년 7월 27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을 맺고, 보름 후에는 2차 영·일 동맹을 통해 영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의 항변(抗辯)에 힘을 보태주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피눈물 나는 일이지만 이것 역시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역사에서 '만일(if)'이라는 가정법(假定法)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지만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부질없이 '만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만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몇 개 사단(師團) 병력을 편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연합국의 일원 자격을 인정받아 1945년 8월 15일 서울에서 개선(凱旋) 행진을 벌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한국과 일본은 승전국과 패전국 입장에서 만났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광복절은 그런 의미에선 회한(悔恨)의 날이기도 하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은 역사의 두 얼굴 가운데 한쪽 얼굴을 자신의 명분으로 내세운 두 나라가 맺은 조약이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회담에서도 승전국의 뜻이 100% 관철되는 경우는 드물다. 당시 한국 경제 규모는 일본의 29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의 종합 국력이 한국을 앞섰던 시대다. 이 상황에서 양국은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합의하고' 합의할 수 없는 부분은 저마다 해석이 가능하도록 회색(灰色) 지대로 남겨두고 회담을 타결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기본 조약 제2조가 그런 회색 지대다. 조약이 체결될 때 불법(不法)이었으므로 당초부터 무효란 해석과 체결 당시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이제는 무효(無效)라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식민 종주국(宗主國)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 국가에 대해 수십 번 사과했다. 그 사과는 도덕적 사과였지 법적 사죄(謝罪)가 아니었다. 이것도 21세기 현실이다.

한국은 한·일 기본 조약 이후의 결과가 나쁘면 '또 하나의 을사조약'이 되고 만다는 각오로 달려와 세계 15위권의 경제 선진국이 됐다.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마음을 녹일 일본의 양식(良識)이다. 장제스(蔣介石)도 마오쩌둥(毛澤東)도 마다했던 물질적 배상에 구애돼선 안 된다. 이제 외교로 그 길을 터야 한다.

나라 안은 두 조각, 세 조각이 나있다. 몽둥이만 쥐지 않았을 뿐 서울 복판 모습은 해방 직후다. 세계 제1 대국과 제2 경제 대국은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때 이랬다. 빨간불 켜진 경제 신호등을 파란불이라고 우기는 건 정권과 정권의 방송과 정권 대변 신문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은 동맹 가치를 돈 저울로 단다. 트럼프가 북한 핵, 한·미 동맹 , 주한 미군 문제를 놓고 내일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할지 누가 예측할 수 있는가. 북한의 미사일·대공포 발사 소리와 패악질을 누가 폭죽(爆竹) 소리라고 하는가. 국민은 불안하고 자존심은 하루하루 무너지고 있다. 국가 과제의 우선(優先)순위를 다시 분명히 정해야 한다. 나라를 망치는 무리 다음에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가 등장했던 기억을 씹고 또 씹을 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6/20190816033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