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 2018.02.09

[Why] 연아·하뉴·준환… 진달래꽃 넥타이가 행운을 주네요

최만섭 2018. 2. 24. 09:58

[Why] 연아·하뉴·준환… 진달래꽃 넥타이가 행운을 주네요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피겨 겨울왕국의 '우승 청부사' 브라이언 오서

1984년 은메달, 88년 은메달
두 번의 올림픽서 두 번의 아쉬움… 은퇴 후 코치로 다시 도전했다

2010년 연아, 14년 하뉴, 18년 하뉴
올림픽 3회 연속 금메달 그의 제자들이 해냈다
마법의 지팡이라도 생긴 걸까

피겨 겨울왕국에 마법학교가 있다면 교장이 누구일지는 자명해졌다. 올림픽 3회 연속 금메달이 보증한다. 2010년 밴쿠버(김연아), 2014년 소치(하뉴 유즈루), 2018년 평창(〃). 브라이언 오서(57·캐나다)는 차준환(17·휘문고)을 비롯해 5개국 제자 5명을 이끌고 강릉에 짐을 풀었다. 개인을 지도하는 코치는 계약직이라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브라이언 오서
“김소월 詩가 새겨진 넥타이, 중요한 대회에서 즐겨 매요” 브라이언 오서(캐나다)가 지난 9일 강릉에서 김소월 시 ‘진달래꽃’이 새겨진 넥타이를 매만지고 있다. 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은메달만 두 번 따낸 2인자였던 그는 김연아부터 하뉴 유즈루(일본)까지 3회 연속 금메달을 이끌었다. 오서는 “피겨만이 아니라 인생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릉=고운호 기자

은메달리스트는 동메달리스트보다 표정이 어둡다. 아깝게 놓친 금메달 생각에 속이 쓰리다. 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거듭 은메달(1984·1988년)에 머문 오서는 그런 불운의 상징과도 같았다. 은퇴 후 코치로 연 인생 2막은 금맥(金脈)을 캔 듯 휘황찬란하다. 재능 있는 선수들을 올림픽 시상대 정상으로 데려가고 있다. 올해도 '우승 청부사'다운 실적을 거뒀다.

평창올림픽이 개막한 지난 9일 강릉 선수촌. 외벽에 '대한민국은 당신이 흘린 땀을 기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팀 코리아' 단복을 입고 나타난 오서가 매고 나온 한글 넥타이엔 김소월 시 '진달래꽃'이 흘러갔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몇 년 전 선물한 넥타이"라며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같아 중요한 대회에서 즐겨 맨다"고 했다.

"준비돼 있고 즐길 줄도 알아야"

'남자 김연아' 차준환은 이날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 섰다. 단체전 쇼트 프로그램에서 시즌 최고점을 받았다. 설 연휴에 열린 남자 싱글에도 출전해 쇼트와 프리, 총점에서 모두 자신의 최고점을 갈아치웠다. 오서는 2015년부터 가르친 그에 대해 "성장 속도가 빨라 4년 뒤엔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은 어땠나요?

"준비한 대로 잘 해냈어요. 점수가 좀 더 높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이와 경험을 감안하면 괜찮은 성적입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겨룬 첫 무대잖아요. 올림픽인 데다 자국에서 열려 국민적 기대치도 높습니다. 이 모든 게 그를 괴롭혔을 거예요. 준환은 이겨냈습니다. 마치고 들어올 때 그렇게 신난 표정을 본 적이 없어요. 긴장과 부담을 떨쳐내는 그 경험, 제가 해봐서 아는데 마약 같아요."

―마약이라고요?

"한번 겪고 나면 다시 느끼고 싶은 소름이랄까요. 그런 순간을 또 열망하게 됩니다."

―소치와 견주면 이곳의 빙질은 어떤지요.

"훌륭합니다. 피겨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은 빙판이 좀 달라야 해요(두 종목 다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리는데 피겨는 영하 4도, 쇼트트랙은 영하 7도로 빙판을 관리한다. 강도는 피겨가 덜 단단하다). 소치에서는 낮에 쇼트트랙을 하고 밤에 피겨를 했습니다. 저녁에 와보면 빙질이 엉망이었죠. 이번엔 낮에 피겨부터 하니 상태가 일관돼서 아주 흡족합니다. 오전 시합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도 있겠지만 적응해야죠."

―우승 후보로 꼽히는 '점프 천재' 네이선 첸(미국)이 오늘 엉덩방아를 찧었지요.

"뛰어난 스케이터들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합니다. 현역 시절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들을 변호하자면, 다음 주 펼쳐질 개인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겁니다."

―단체전엔 몸풀기로 가볍게 임하나요?

"선수들은 진지합니다. 팀 전체가 잘하길 바랄 테니까요. 하지만 심리적으로 자신이 아닌 팀에 비중을 더 두기는 어렵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거물급이니까요. 올림픽까지 4년을 기다렸어요. 다시 못 올 수도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지금 키스 앤드 크라이(kiss & cry) 존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코치는 어떤 심정인가요.

"제자의 스케이팅을 볼 때는 그(그녀)와 같은 마음입니다. 저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흥분해요."

위로부터 김연아, 하뉴 유즈루, 차준환
―1988년 올림픽에서 당신은 0.1점 차이로 금메달을 놓쳤습니다.

"실망했고 화가 났지요. 4년간의 고생이 물거품이 됐다는 걸 믿기 어려웠어요."

―'모든 경험이 나를 가르친다'고 말한 적이 있더군요.

"저는 '준비(preparation)'라는 낱말을 가장 좋아해요. 선수는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하나 더 보태자면,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날 스케이팅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수많은 관중, 링크에 흐르는 긴장감까지 즐겨야 우승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4회전 점프는 '고위험·고수익'?

오서는 네 살 때 스케이트화를 처음 신었다. 스케이팅이 주는 속도감, 공중으로 몸이 떠올랐을 때 느껴지는 자유로운 감각에 끌렸다고 한다. 날마다 얼음판에서 독학으로 점프와 스핀을 익혔고 바지가 푹 젖은 채 집에 돌아왔다.

지도자를 만난 뒤부턴 새로운 점프를 배우면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마음속으로 그 점프의 과정을 복습하곤 했다. “재능이란 즐거워서 스스로 노력하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올림픽에서 트리플 악셀(3회전 반 점프)을 처음 성공(1984년)해 별명이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었지요.

“2006년에 만난 김연아는 트리플 악셀과 트리플 루프를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녀는 이미 주니어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재능과 속도감, 기술은 흠잡을 데 없었지요.”

―당신이 활약하던 시절과 견주면 요즘 점프 기술은 얼마나 발전했나요?

“점점 더 능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장착해야만 하는 분위기예요.”

―실제로 남자 싱글은 ‘4회전 점프 전쟁’으로 불립니다. 그게 고위험·고수익 투자라는 데 동의하나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Yes and no).”

―무슨 뜻인가요?

“스케이팅 애호가나 국제빙상연맹(ISU), 심판들은 아마 좌절감을 느낄 거예요. 4회전 점프는 스케이팅의 어떤 부분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기술을 구사하느라 안무가 무너지고 연기가 무너져요. 깨끗하게 성공해 큰 점수를 따는 경우는 드물고, 실수를 만회하려다 또다시 실패합니다. 저는 이해가 안 돼요. 무엇보다 그 기술을 연마할 시기가 따로 있습니다. 10대 후반에야 쉬울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수월하지 않거든요. 결국 큰 부상을 입곤 합니다.”

―문외한이 보기엔 눈이 호강하는 것 같습니다만.

“화려하죠. 동작이 크고 빙판을 넓게 커버합니다. 보통 가산점(+3점)을 받고요. 하지만 쿼드러플 플립은 착지가 불안해집니다. 그게 프로그램에 결함을 일으켜요. 감점(-1점)이 따를 수도 있죠. 그럼 애당초 시도 안 한 것과 점수가 같아요(웃음). 바꿔 말하면 4회전 점프 말고도 품질을 다듬어야 할 게 많다는 얘깁니다. 우아함, 스핀(회전), 트랜지션(수행요소들 사이의 연결고리), 스텝, 안무, 속도…. 스케이팅 애호가들은 그런 것의 완성도에 더 끌립니다. 이젠 질문을 바꿔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어떻게요?

“왜 그렇게 많은 4회전 점프를 구사하는가? 왜 여러 위험을 무릅쓰는가? 피겨 팬 대부분은 현재의 채점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선수가 어떻게 저 선수를 눌렀는지 요령부득할 때가 있어요. 그럼 새로운 관중을 얻기 힘들어집니다.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만족시켜야죠. 깔끔하고 아름답게 프로그램을 완수한 선수가 좋은 점수를 받는다면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그래야 피겨 인구가 늘고 광고도 붙어 결국 선수에게 도움이 될 테고요.”

―김연아와 차준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라면.

“둘 다 재능과 열정이 있고 노력파예요. 음악을 몸으로 표현할 줄도 압니다. 안무가도 데이비드 윌슨으로 같고요. (난감해하며) 차이요? 그건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해달라는 것과 같아요(웃음).”

―그 ‘아빠 미소’는 여전하군요. 2010년 여름 김연아와 헤어질 땐 잡음이 있었지요.

“(평창올림픽 홍보대사이자 집행위원인) 연아의 삶은 온 힘을 쏟은 이 굉장한 올림픽의 일부겠지요. 그동안 저는 토론토에서 선수들을 가르쳤어요. 인생이 완전히 갈라져 관계도 멀어졌습니다.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예요. 소치 때는 연아가 하뉴의 금메달을 축하해줬어요.”

1988년 ‘브라이언 전쟁’ 1988년 동계올림픽 피겨 남자 싱글 시상식. ‘브라이언 전쟁’이라 불린 브라이언 오서(왼쪽)와 브라이언 보이타노(가운데)의 승부는 0.1점 차이로 갈렸다.
1988년 ‘브라이언 전쟁’ 1988년 동계올림픽 피겨 남자 싱글 시상식. ‘브라이언 전쟁’이라 불린 브라이언 오서(왼쪽)와 브라이언 보이타노(가운데)의 승부는 0.1점 차이로 갈렸다. /브라이언 오서 제공
“내가 가르친 건 피겨 아닌 인생”

오서는 자서전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에서 “희로애락을 빙판에 쏟아야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다. 무표정한 연아를 웃게 만드는 게 숙제였다”고 썼다. 약속한 인터뷰 시간(30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뉴의 올림픽 2연패를 낙관하나요?

“곤란한 질문이군요. 다른 제자 페르난데스도 금메달 후보입니다. 누가 우승해도 기쁠 테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긴 해요. 부자 관계와 비슷해서 어느 아들만 편들 순 없습니다. 누가 나은지 심판들 눈에 맡겨야죠(결국 하뉴가 금메달, 페르난데스는 동메달을 땄다).”

―제자가 또 금메달을 딴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나요.

“자랑스러울 겁니다. 4분 30초(프리스케이팅)를 위해 4년간 어떻게 준비했는지 아니까요. 하뉴와 페르난데스, 여자 싱글의 개브리엘 데일먼(캐나다)도 메달을 딸 수 있다고 봅니다. ‘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 hatch(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아직은 부화 전이니 이 달걀들을 잘 간수해야죠(웃음). 선수들이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시기라 언행을 조심합니다. 몸짓언어도 세심하게 고르고, 최대한 많이 웃겨주려고 노력해요. 함께 같은 방향을 보고 걷기도 하고요.”

―정상급 선수들도 실패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할 텐데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도 시합의 일부예요.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은 기술과 체력, 음악성과 표현력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최고의 선수들은 결국 해내지요.”

―차준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새롭게 들려줄 말은 없어요. 오늘 경험이 그에게 뭔가 이야기해주겠지요. 긴장을 내려놓으면 잘 풀릴 거예요. 언젠가 날아오를 겁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당신 앞에 줄을 섭니다. ‘킹 메이커’로서 비법이 있나요?

“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하며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게 제 일입니다. 혼자가 아녜요. 트레이시 윌슨(스핀 코치)을 비롯해 훌륭한 팀이 저를 떠받칩니다. 저는 또 선수들을 개별적으로 다룹니다. 성격과 문화, 장단점과 가정 사정이 다 다르니까요. 일단 뭘 필요로 하는지 늘 귀담아듣지요. 정상은 하나지만 그곳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제각각 다른 셈입니다.”

―그중에서 핵심이라면.

“언제나 선수를 중심에 둡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제가 아니라 선수가 따니까요. 빙판에서 그들이 빛나야 합니다. 아울러 피겨가 아니라도 인생에서 중요한 뭔가를 경험하고 배워가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언젠가 은퇴해 자신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요.”

비법을 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명이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었고 1988올림픽에서 예술 점수가 가장 높았다. 이쪽(기술)과 저쪽(예술)에 두루 능했다.

오서는 “바라건대 제 자들은 삶의 기술(life skill)도 배웠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대부분 부모와 떨어져 지내잖아요. 기술뿐만 아니라 매너를 익히고 남을 존중할 줄도 알았으면 해요. 재능만으론 최고가 될 수 없어요. 위대한 선수는 실패를 통해 성장합니다. 친절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매너는 그래서 어떤 금메달보다 값져 보여요.” 오서는 스케이팅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3/20180223018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