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감정샷 시대
가상화폐 폭락에 '분노 인증', 장례식장에선 '추모 인증'… 감정까지 인증하는 '인증공화국'
인스타에 '#우울' 사진 41만장, '#슬픔'은 26만장‐ 소셜미디어로 감정 표현 욕구 충족
'좋아요' 공감 얻으려 더 슬픈 척, 더 화난 척…
실제의 나와 정체성 분리돼 더 힘들어질 수도
'-45% 먹고 화장실에서 고함지르다 욕조 빠갰다. 샤워 어디서 하냐, 이제….'
최근 가상 화폐 가격이 폭락하는 동안 인터넷에선 일부 투자자들의 '분노 인증'이 이어졌다. 그전까지 높은 수익률을 서로 자랑하던 게시판에 부서지고, 엎어지고, 망가지고 깨진 무언가의 사진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내리찍어 끔찍하게 구멍 난 방문, 방바닥에 쏟아버린 라면, 수익률을 확인하다 홧김에 그대로 부순 듯 쩍쩍 금이 간 컴퓨터 모니터…. 격한 감정을 고스란히 배설해낸 듯한 이미지들이었다.
![셀카를 꼭 웃는 낯으로만 찍나. 슬픈 표정, 화난 얼굴로도 찍는다.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뭐든지 인증하는 시대, 눈에 안 보이는 감정도 예외는 아니다.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Getty Images](http://life.chosun.com/site/data/img_dir/2018/02/08/2018020801639_0.jpg)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저질렀다는 과격한 행동을 사진으로 보여줌으로써 각자 자신이 얼마나 화났는지를 경쟁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표출된 감정은 줄기를 이룬다. 투자자들은 가상 화폐 정책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정부를 향해, 계층 상승의 꿈이 사라져가는 사회를 향해 분노했다.
사진 찍기를 금기시했던 추모나 애도의 현장에서 찍은 인증 샷도 이젠 낯설지 않다. 요즘 대세인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장례식장'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사진이 4000장이 넘는다. 대체로 영정이나 조화(弔花), 부의금 봉투 등이 나오게 찍은 사진에 그리움을 담은 짧은 글을 붙인 형식이다. 조문객은 물론 유족이 올린 사진도 많다. 세상 떠난 연예인이나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이들이 애도 메시지를 쪽지에 적어 붙인 '추모의 벽'도 인증 샷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
대한민국이 '인증공화국'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왔다고, 밤새 줄 서서 한정판 제품을 손에 넣었다고 쉴 새 없이 사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이젠 사물을 인증하고 또 인증하다 감정까지 인증하는 사회가 됐다. 가장 내밀하고 무형인 감정, 그중에서도 분노와 슬픔이 새로운 피사체가 됐다. 감정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 공유하는 '감정 인증 샷'이 급격히 퍼지고 있다.
공감은 일종의 인정(認定)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유명한 ‘욕구 5단계론’에서 인정 욕구는 4단계에 해당한다. 매슬로는 인간이 낮은 수준의 욕구를 충족시킨 뒤에 더 높은 수준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봤다. 말하자면 ‘감정 인증’은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시킨 뒤에야 바라볼 수 있는 고차원의 욕구인 셈이다.
![지난해 말 숨진 가수 종현을 추모하며 팬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 “수고했어요 종현아”라고 적은 검은 리본 이미지가 애도의 징표로 공유됐다.인스타그램 캡처](http://life.chosun.com/site/data/img_dir/2018/02/08/2018020801639_1.jpg)
감정을 어떻게 인증할까. 예를 들자면 이렇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조문객이 뜸한 사이 흰 국화와 영정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 ‘할머니’ ‘장례식장’ ‘슬픔’ ‘사랑해요’ 같은 단어에 해시태그(#)를 붙여 꼬리표를 단다.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도 붙인다. 보여주려는 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거나 그래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슬프고 아쉬운 감정 그 자체다. 이 사진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넷엔 실제로 이런 사진이 많다.
한국은 인터넷 선진국이다. 초고속 인터넷이 세계에서 제일 빨라서만은 아니다. 빠른 인터넷은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탄생시킨다. 한국인들이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단어 ‘인증 샷’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영어에 없다는 사실은 사진으로 뭔가를 증명하고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일이 꽤 한국적인 현상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텍스트보다 이미지, 감정도 쓰기보다 인증
지금까지는 주로 자랑할 만한 물건이나 상황을 인증했다. 맛집, 멋진 풍경, 예쁜 옷, 완벽한 화장…. 이젠 ‘사물 인증’에서 ‘감정 인증’으로 인증의 범위가 확장됐다.
감정 인증은 언어보다 이미지로 의사소통하는 데 익숙한 젊은 층 중심의 문화다. 이들의 활동 무대인 인터넷이 실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 PC 시대의 게시판은 글로 표현한 내용을 사진이 보완했다.
모바일 전환기에 등장해 시장을 평정한 페이스북에서 이미지의 비중이 커졌다. ‘좋아요’를 눌러 타인의 글·사진에 공감을 표할 수 있는 기능도 페이스북의 성공 비결 중 하나. 사용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싫어요’는 끝내 도입되지 않았지만 2015년 ‘화나요·슬퍼요·웃겨요·멋져요’ 등을 추가로 도입해 더 다양한 감정을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일러스트= 김의균](http://life.chosun.com/site/data/img_dir/2018/02/08/2018020801639_2.jpg)
인스타그램 등 페이스북에 이어 주목받는 서비스에선 이미지가 주연이고 글은 조연이다. 구구절절 글로 늘어놓는 대신 하나의 사진으로 메시지를 표현하고 공유하다 보니 자기 감정을 표현한 인증 샷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미지 중심의 인터넷 공간에선 ‘#’ 기호 뒤에 단어를 붙인 태그(tag)가 이미지를 보완하는 ‘글’에 해당한다. 태그는 사진에 달아놓은 꼬리표이자 주제가 비슷한 사진을 찾는 단서도 된다.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인기 있는 태그다. 인스타그램에는 ‘#우울’ 태그가 달린 사진이 41만장, ‘#슬픔’이 달린 사진은 26만장이 넘는다. 이런 감정이 흔히 공유된다는 뜻이자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감정을 인증하라고 타인에게 은연중에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아이돌 그룹 샤이니 멤버 종현이 사망했을 때 동료 가수 자이언티가 공개했던 한 네티즌의 소셜 미디어 메시지가 이를 보여준다. 메시지 내용은 ‘왜 종현의 빈소에 조문을 가지 않았느냐’는 것. 자이언티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갔어요. 기자분들 다 빠졌을 때. 나도 인간이라 슬픕니다. 조문을 사진 찍히기 위해 가나요. 슬픕니다.’ 조문을 사진 찍히러 가느냐고 반문하면서도 결국엔 ‘슬프다’고 밝혔다. 행간에 서글픔이 묻어난다.
감정 과잉 인증, 부작용 부르기도
감정을 인증하는 심리는 어떤 것일까. 전문가들은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기본적 욕구에 인터넷, 소셜 미디어가 ‘통로’를 제공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해 왔다. 감정을 내놓으면 위로를 받고 환기가 되기 때문. 혼자 좋아하고, 혼자 화내는 것보다 누군가 공감해줄 때 감정의 ‘효율’이 훨씬 높아진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예의이자 미덕으로 생각했던 한국도 최근 들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감정을 인증하기에 꽤 좋은 도구다.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원래 친한 사람, 가족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면 인터넷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드러내고 싶은 감정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가리는 게 가능하다.
![](http://life.chosun.com/site/data/img_dir/2018/02/08/2018020801639_3.jpg)
일부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이 ‘처음엔 외로움이 줄었는데 (소셜 미디어를) 계속 하다 보니 더 외로워졌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동안 외로움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주목받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꾸며내다 보니 어느새 다른 사람 행세를 해야 하더란 얘기다.
인증을 위한 인증…인증 강박
인증은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에 시작됐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은 키보드만 있으면 누구나 명문대생인 척할 수 있고, 부자 행세도 할 수 있는 ‘사칭의 바다’이기도 했다. 이용자들이 각자 주장하는 바를 증명하고자 찍어 올리던 사진이 인증 샷이다. 네티즌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통하는 인증 샷 촬영 규칙도 있다. 합성하거나 복사해오지 않고 직접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어야 ‘효력’을 인정받는다. 예컨대 부자임을 인증하려면 잔액이 두둑한 통장 옆에 자기 ID를 자필로 적은 메모지를 함께 놓고 찍는 식이다.
선거 때마다 ‘투표 인증 샷’이 유행하고 기업에서도 제품 사진을 찍어 올리면 경품을 주는 식의 ‘인증 샷 이벤트’를 자주 열면서 인증 샷이라는 말이 퍼졌다. 의미도 점점 확대돼서 이제는 사진을 찍어 올리고 공유하는 행위를 통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는 ‘한파 인증 샷’이 유행했다. 빨랫줄에 말리는 동안 고드름이 달린 청바지부터 베란다에 내놓은 사이 얼음덩이가 돼버린 국까지 한파에 꽁꽁 얼어버린 온갖 것들의 사진이 ‘#얼었어’라는 태그와 함께 올라왔다. 이런 물건들이 정말로 한파에 얼었음을 엄밀하게 인증한 것도 아니고, ID가 나오게 사진을 찍어 내 바지, 우리 집 냄비임을 인증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베리아보다 춥다는 날씨를 새삼 실감시켜주는 사진들을 사람들과 같이 보며 웃었을 뿐이다. 인증은 이제 팩트를 증명하는 행위뿐 아니라 놀이이자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