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건축은 흙입니다"

최만섭 2017. 10. 21. 06:59

"건축은 흙입니다"

입력 : 2017.10.21 03:02

[송혜진 기자의 느낌] 이천 '납골당 호텔' 설계한 스타 건축가 최시영
"사랑하는 이가 잠든 곳… 이보다 아름다운 쉼터가 있을까"

내비게이션에 건축가 최시영(61)이 불러준 주소를 입력했더니 '호텔'이 떴다. 그는 분명 "내가 묻힐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었다. 지난 18일 경기 이천시 마장면까지 차로 한 시간쯤 달려갔다. 산자락이 낮게 깔린 곳이었다. 갖가지 가을꽃과 수크령 풀이 한껏 흐드러진 정원, 드넓은 잔디와 연못, 담백한 건물들이 보였다. 인부 몇 명이 밭에 가을 국화를 새로 심고 있었다. 대체 여기 어디 묻히겠다는 건가. 두리번거릴 때 최시영이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리 찾아요? 여기 맞아요. 여기가 호텔이고, 납골당이죠."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말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경기도 광주 텃밭 ‘파머스 대디’에는 수십 종의 꽃과 나무가 그림처럼 들어서 있다. 최시영은 “빛깔과 모양, 피고 지는 시기를 섬세하게 계산해서 완성한 피땀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사시사철 꽃과 풀을 계속 바꿔 심어요. 이곳에선 잠시도 쉴 틈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이렇게 일하고 나면 오히려 제대로 쉰 것 같아요. ‘아이고 죽겠다’ 하는데 도리어 살 것 같죠.” / 김지호 기자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쉬는 정원

―여기가 납골당인가요.

"그렇게 안 보이죠? 저쪽이 호텔이고 여긴 식당이고 카페예요. 저 위가 예배당이고 그 아래 납골당이 있어요.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겠지만(웃음)."

납골당에 호텔이 다 있군요.

"사랑하는 사람이 묻힌 곳이니 이보다 아름다운 쉼터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나도 그랬어요. 원래 부모님 유골을 안성에 모셨는데, 거긴 몇 해를 가도 낯설었어요. 갈 때마다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중얼거리고 얼른 나왔죠. 오래 있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 근처 밥집조차 들러본 적이 없어요. 차갑고 무섭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곳이었으니까요. 여긴 정반대죠. 아기자기해요. 꽃과 나무가 있고 호수가 있죠. 아이들 풀어놓고 산책하기도 좋고, 볕 좋은 날 머물러 있어도 괜찮죠. 내 사랑하는 이가 묻힌 곳에서 나도 쉬다 가는 겁니다."

최시영은 지난 30년 동안 타워팰리스·헤르만하우스 등 당대 가장 트렌디한 건축물을 설계해왔다. 실내 건축으로 특히 유명했다. '몇 평형 집에는 방 몇 개 화장실 몇 개' 식의 획일화된 한국 인테리어 공식을 깬 주인공이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여백의 미를 자랑하는 공간을 이미 1990년대 초 제안했고 비슷한 시기 국내에 북카페라는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에는 평택 북 시티, 인천공항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다. 2002년 완공된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는 방을 줄이고 음악감상실, 서재 등 취미를 즐길 수 있는 패밀리 룸을 넣어 또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이젠 '납골당 호텔'을 지은 것이다. 최시영은 "처음엔 반대하는 목소리도 컸다"고 했다.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했겠죠.

"왜 아니겠어요. 산 너머 주민들까지 '땅값 떨어진다'고 항의하고 시위하고 그랬죠. 그런데 막상 완공되고 나서 보니 생각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잖아요. 문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주말이면 아이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산책하는 이들로 붐벼요. 처음엔 시(市)에서도 걱정됐는지 계속 나와 보고 그랬는데, 최근엔 '기왕이면 호텔을 더 늘려 지어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이곳 공간이 제법 괜찮아 보였던 거겠죠."

―납골당과 호텔을 한데 묶어 짓는 것을 허락한 건축주도 대단하고요.

"맞아요. 교회 담임목사님인데 그분도 배짱이나 안목이 보통 아닌 거죠(웃음). 애초 이곳 땅 주인이 호텔 사업을 했어요. 호텔 지어 장사하려고 골조까지 올렸는데, 근처에 한 대기업이 25층짜리 호텔을 짓는다는 거죠. 땅 주인이 그 말에 '난 망했구나' 하면서 손 놓은 거예요. 누가 저더러 그분 안됐으니 상담 좀 해주래요. 찾아가서 그랬어요. '여기에 텃밭과 정원을 정성껏 꾸미면 대기업 건물이 들어오든 말든 잘될 거다'라고요. 근데 영 '무슨 소리 하느냐'는 표정만 지으시더라고요. 나중에 한 교회 목사님이 납골당 지을 곳을 찾는다는 말에 여기 생각이 났고 '호텔이랑 같이 지어보자'고 제안한 거죠. 근데 목사님이 뭘 알아도 잘 아는 분이에요. '그 납골당 호텔, 장례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요' 하시더라고요(웃음)."

경기도 이천 ‘납골당 호텔’의 일부 모습. 삼각 지붕 예배당 아래엔 유골을
경기도 이천 ‘납골당 호텔’의 일부 모습. 삼각 지붕 예배당 아래엔 유골을 보관하는 봉안당이 있다. 또 그 앞 작은 연못엔 화장한 유골을 흩뿌려 정원으로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한 자연장 시설이 있다. / 최시영 제공
―잘 모르고 온 사람은 이곳에서 큼지막한 꽃밭과 나무만 보다 갈 것 같은데요.

“그게 핵심이에요. 쩌렁쩌렁 위용을 과시하는 건물만 있는 곳에선 오래 머물지를 못해요. 기에 눌리거든요. 숲과 밭은 그러나 반대죠. 더 앉아 있고 싶고 머물고 싶죠. 이곳 지을 땐 그래서 건축 자재만큼이나 수종(樹種)에 신경 썼어요. 수크령(억새식물), 속새(상록양치식물), 데이지·국화, 측백나무·편백나무·블루엔젤·산딸나무를 어디에 심고 얼마나 심을까를 머리 싸매고 고민했죠.”

―건물보다 꽃밭이 더 중요하다?

“무척요. 사람이란 게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아닙니까. 이걸 깨달은 게 한 7~8년 전쯤 됩니다. 나무가 없고 풀이 없고 꽃이 없으면 제대로 된 완성이 아니라는 것 말이죠. 초록은 필터와도 같아요. 도시의 혼탁함을 걸러주죠. 이것 없는 쉼이란 결국 불완전한 거죠.”

쓰러지자 비로소 밭(田)이 보였다

최시영은 1995년 7억원짜리 어음을 못 막아 부도를 맞은 적이 있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넘기면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 수준에서 1만달러로 치솟던 시기였다. 너도나도 ‘이젠 집이다’라고 했다. 최시영은 그때 전국 곳곳을 돌며 주택 설계를 하고 시공했다. 들어오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받았다. 그러다 덜컥 부도가 났고 알거지가 됐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분만실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며 엉엉 울었다. 최시영은 “그때 ‘꼭 금방 일어나겠다’고 이를 갈았다”고 했다.

바닥 칠 때 떠오르는 법이다. 최시영 몸값은 부도 이후 오히려 치솟았다. 보통 다른 설계사보다 두세 배 넘는 가격을 불렀고, 시공도 안 했다. 현찰 먼저 받지 않으면 일을 시작조차 안 했지만 1988년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업체가 앞다퉈 대형 고급 주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다들 최시영만 찾았다. 그의 이름이 브랜드로 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빚을 모두 갚았다. 최시영은 “당시 국내 주상복합 건물은 거의 다 지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나요.

“그런 줄 알았죠. 근데 그게 또 아니었어요. 일은 자꾸 밀려들어오는데, 계약할 때마다 부담되고 죽겠는 거죠. 클라이언트들은 어찌나 매번 다들 그렇게 ‘빨리 해달라’고 하는지. 시간이 충분했던 적이 없죠. 한국 사람들은 그런데 또 다들 수퍼맨 아녜요? 직원들 닦달하면서 그 말도 안 되는 일정과 작업을 어떻게든 또 해내면 또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건 정말 소진(消盡)의 연속인 거예요. 마지막까지 짜내서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남은 방울을 찾아 짜내야 하는 거죠. 그렇게 억지로 기름칠하면서 바퀴를 굴렸는데, 어느 날 탁 부서졌어요. 더는 굴러갈 수가 없었어요. 시쳇말로 멘붕이 온 거죠.”

이미지 크게보기
경기도 이천 메모리얼 리조트 봉안당 건물 앞에 선 최시영. 거대한 손 조각은 박장근 작품이다. / 김지호 기자
그건 일종의 공황(恐慌)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차를 달렸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경기도 광주 텃밭이었다. 평생 ‘건축가 같은 것 하지 말고 밭이나 일구라’고 잔소리했던 아버지였다. 그는 그러나 땅이니 밭이니 꼴도 보기 싫었다. 대학 졸업하고 집 나와서는 아버지도 밭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무의식 중에 그곳에 닿은 것이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은 폐허가 돼 있었다. 사람 키만 한 잡초가 빽빽했다. 최시영은 “그때 나도 모르게 낫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밭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을 텐데요.

“없었죠. 같이 차 몰고 간 직원하고 되는 대로 낫을 휘둘렀는데 온몸이 아파 몇 주를 고생했죠. 팔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어요. 근데 이상하죠. ‘아, 내가 미쳤지. 이 짓 왜 했지’ 하고 돌아와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다음 날 눈뜨니 상쾌한 거죠. 몸은 아프고 죽을 것 같은데 그 기분이 괜찮은 거죠. 나도 모르게 ‘그곳에 언제 또 가지’ 하고 있더라고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주위 농부를 붙잡고 물어가며 밭일을 배웠다. 잡초 없애고 가지 치는 법을 익혔다. 지방 출장, 외국 출장을 다녀도 그 동네 논밭만 보였다. 도시만 다니던 건축가는 어느덧 일본, 베트남, 미얀마, 영국과 네덜란드 농촌 마을을 헤매고 있었다. ‘우리나라 밭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밋밋하고 안 예쁠까’라는 의문도 그 무렵 품게 됐다.

―왜 그렇죠.

“전쟁과 산업화를 거친 탓이죠. 원래는 안 그랬어요. 꽃밭이라는 말을 보세요. 꽃과 밭이 한데 있잖아요. 우리도 배추나 무를 심으면 그 곁에 꽃을 같이 심곤 했어요. 전쟁 끝나고 먹고살기 어려워지면서 밭도 효율적으로 경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됐어요. 이모작을 해야 했고, 너도나도 같은 모양의 비닐하우스를 지어댔죠. 그런 밭에 디자인이 들어갈 틈이 없죠. 그렇지만 이젠 다들 먹고살 수 있게 됐잖아요.”

밭 디자인을 다시 배웠다. 둘째 아들을 데리고 영국 글래스고부터 콘월까지 돌며 유명한 밭과 정원을 찾아 다녔다. 땅을 갈아엎지 않고 토양재배로 작물을 키우는 ‘베드(bed)’ 개념을 익혔다. 2010년 초쯤에는 광주광역시에서 화학비료나 퇴비를 주지 않고 자연 그대로 경작하는 농부 송광일씨를 만났다. 2년째 그가 시키는 대로 농사를 지어봤다. 모든 것이 세상 속도와 정반대였다. 때 돼야 물 줄 수 있고, 때 돼야 열매를 맺었다. 잘못 심은 것은 맘대로 뽑지도 못했다. 그것조차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최시영은 “용담초를 볕 잘 드는 곳에 심었는데 도통 꽃이 피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늘에 심어야 한다는 걸 알고 4년 전 옮겨 심었다. 올해 그 용담이 드디어 꽃을 피웠다. 그 꽃을 볼 때의 감격은 신(神)만이 아실 것”이라고 했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 ‘세상의 모든 아침’(오른쪽). 최시영은 이곳을 실내 농장처럼 보이도록 설계했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 ‘세상의 모든 아침’(오른쪽). 최시영은 이곳을 실내 농장처럼 보이도록 설계했다. / 최시영 제공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 덕분에

최시영은 지난달 부모님 유골을 자신이 지은 이천 납골당으로 옮겼다. 그는 “새로 그곳에 아버지 모시는 날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워하셨다고 했죠.

“엄청요(웃음). 사실 난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펄쩍 뛰었죠. 학창 시절 내내 미술대회 상을 휩쓸다시피 했는데, 상장을 늘 몰래 가방 깊이 숨기고 다녔어요. 아버지가 보면 화내셨으니까. 결혼을 37살에야 했는데, 그것도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처럼 늙어가기 싫었죠. 무섭고 두려웠어요. 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만지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뒤늦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어요. 아버지는 원래 사업을 하셨고 뒤늦게 과수원과 농장을 하셨거든요. 환상을 품고 일을 시작했지만 막상 해보니 농사가 만만치가 않았겠죠. 아버지는 나 또한 당신처럼 환상을 갖고 건축 하겠다고 덤볐다가 넘어질까 걱정했을지도 모르죠. 잘못 심은 풀처럼 함부로 캐내진 못하고 조바심 내며 화내고 소리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그 덕에 고집스럽게 잘 자랐으니 이 또한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

최시영은 텃밭 일을 7년 하며 캐낸 영감과 지식을 토대로 최근 실내 건축 트렌드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쯤에는 비닐하우스를 새로 디자인했다. 뾰족한 지붕에 창문까지 있는 반듯하고 예쁜 비닐하우스였다. 그 비닐하우스 안에 화분을 넣어 텃밭처럼 꾸미고 에스프레소 기계와 카페 의자까지 있는 ‘스쿠프 가든(scoop garden·국자만 한 정원이라는 뜻)’을 디자인했다. 서울 가로수길에 스쿠프 가든이 들어서자 그 자투리 공간에 사람이 밀려들었다. 경기 용인시 논두렁 옆에는 ‘알렉스 더 커피’라는 카페를 세웠다.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간이 유리집이었다.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외진 농촌 마을까지 찾아와 그곳에서 사진 찍고 차 마시고 갔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선 ‘밭을 디자인하다’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었고, 2016년에는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꼭대기층을 농장처럼 꾸며 화제를 뿌렸다. 최시영은 “텃밭, 초록, 자연이라는 주제에 결국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밀고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확신한다고 해서 누구나 밀어붙일 수 있는 건 아니죠.

“그 또한 아버지 덕분일지도 몰라요. ‘아버지가 뭐라 잔소리하든 내 맨주먹으로 헤쳐나갈 거다’라는 오기로 지금까지 왔으니까요. 그 탓에 종종 ‘싸움닭’ 소리도 들었고 때론 ‘콧대 높다’는 힐난도 받았지만, 어쩌겠어요. 남들이 안 해본 것을 해내려면 좋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는 거죠.”

―아버지께서 새로 옮긴 곳을 편안해하실까요.

“아마도요.” 최시영이 말을 끊고 측백나무 빼곡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걱정 많이 했어요. 꿈에 나타나서 ‘너 왜 날 옮겼냐’ 고 꾸짖으실까봐(웃음). 오늘 이곳에 와서도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아버지, 저 또 왔어요. 아버지가 싫어서 도망다닐 때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자주 보시게 될 거예요. 꽃 보듯 풀 보듯 햇빛 보듯 그냥 저를 편히 대해주세요’ 했죠.” 그가 말을 마칠 무렵 도드람산 너머 구름이 낮게 깔렸다. 자잘한 빗방울이 후드득 꽃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