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박해현의 문학산책] 삶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아오른다

최만섭 2017. 10. 19. 09:38

[박해현의 문학산책] 삶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아오른다

입력 : 2017.10.19 03:13

노벨문학상 작가 이시구로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정교한 작품
제목도 다양한 해석과 번역 가능
과거 부정도 옹호도 못 하는 개인… 웃기고 슬픈 인생의 참된 의미는 저녁 무렵이 돼야 알게 된다는 것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올해의 노벨 문학상은 일본 출신의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이시구로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장편소설 '남아 있는 나날'(송은경 옮김)은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속은 복잡하다. 우선 원제 'The Remains of the Day'부터 한마디로 번역하기 까다롭다. 프랑스어 번역 제목은 'Vestiges du jour'인데 '그날의 자취(흔적·잔해·추억)'를 뜻한다. 영어 원제를 직역한 셈이다. 그런데 펭귄 출판사가 이 소설을 독서 교재용으로 편집한 오디오 북의 해설에 따르면 원제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우선 옛 영국의 잔존물을 뜻한다. '영국 상류 계급이 더 이상 소유할 수 없게 된 시골 대저택의 유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저녁'을 지시한다. "저녁은 사람들이 일생을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노년기를 상징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제공한다"고 펭귄 출판사 교재는 풀이했다. 이 소설에서 저녁은 과거가 아니라 주인공의 현재에 속한다. 한편 위키피디아에 실린 이 소설 풀이에 따르면, 화자(話者)가 소설 끝 부분에 이르러 '그의 삶의 나머지(remains of his day)'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한국어판 제목 '남아있는 나날'은 원제에서 주인공의 추억보다는 여생(餘生)을 더 강조하는 번역어를 선택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원제가 지닌 회상의 의미는 담지 못해 오역 논란도 일어났다.

더보기 Click

제목의 의미 못지않게 이 소설 방식도 간단치 않다. 1인칭 화자(話者)의 고백체 소설이라 단순해 보이지만, 화자 '나'가 문학 비평 용어로 말해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점에서 꽤 꼬여 있다. 그의 회상은 과거를 주관적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기 망상의 연속이다. 스토리는 표면과 심층으로 나뉘고, 서술 방식도 명시(明示)와 암시(暗示)가 갈마들면서 복잡 미묘해진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삶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아오른다
/이철원 기자
그러나 이 소설의 묘미는 '나'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명쾌하게 드러난다. '나'는 1920년대부터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執事)로 일해 온 스티븐스. 1956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스티븐스가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집사는 일반 하인과는 달리 전문 직업인이므로 신사 못지않게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스티븐스의 직업 정신이었다. 집사의 소명이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 정치계의 거물이자 유럽의 파시즘에 우호적이었던 귀족 주인을 향해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주인은 몰락해 세상을 뜨고 대저택은 미국인 갑부에게 팔렸다. 대영제국의 쇠락은 바삐 이뤄지고 말년에 접어든 스티븐스는 새 주인을 모시게 됐다.

이 소설은 스티븐스가 새 주인의 권유로 6일간의 장기 여행에 처음 나선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현재 여행은 과거 회상과 겹친다. 대영제국의 낙일(落日)을 둘러싼 정치 상황과 풍속 변화를 재현하지만, 궁극적으론 노벨상 위원회가 트위터로 밝힌 대로 '개인의 기억과 과거, 자기 망상'의 관계를 탐구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성찰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유도한다. '나'는 불의(不義)에 순응한 자기를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비판한 타인의 언어도 생생하게 기억해내 회상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옹호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망상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지배한다. 주인공이 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편지 한 통이 불러일으킨 착각 때문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그 가슴 아픈 이야기의 결말은 접어두자. 미망(未忘)마저 없다면 노년의 문턱은 너무 쓸쓸하다. 아무튼 이 소설은 은발의 '나'가 여정의 끝에 또래 동업자를 만나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라는 의미심장한 충고를 얻으면서 마무리된다. 저녁의 위안이 '나'의 허무와 비애를 쓰다듬어준다. '나'는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나"라며 다시 앞을 바라본다. 늘 무뚝뚝했던 '나'는 여행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뒤늦게 '농담'에 눈을 뜬다.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는 열쇠'라고 깨닫는다. '나'는 저택에 되돌아가서 새 주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모든 역량을 바쳐 '농담의 기술'을 발전시키기로 진지하게 결심한다. 피식 웃기면서도 짠하게 슬픈 대목이다. 삶은 이처럼 황혼이 깃들 무렵 가볍게 날아오를 경지에 이른다.

*미망-사리어두워 갈피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8/20171018038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