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허둥대며 나간다,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세찬 바람에 내 몸 맡긴다"

최만섭 2017. 1. 23. 09:27

[최보식이 만난 사람] "허둥대며 나간다, 기다리는 사람 없는데… 세찬 바람에 내 몸 맡긴다"

입력 : 2017.01.23 03:03

['부산 자갈치 아지매'로 살아온 55년… 한순지씨]

"남편 死亡 소식에 앞이 캄캄… 눈물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울어본 적 없다, 다섯 자녀 키워야 했으니…"

"'북송선' 탔던 오빠와 동생, 40년 만에 '畵像 상봉' 이뤄져
서로 울다 보니 한 시간 지나… '왜 북한 갔느냐' 묻지 못했다"

한순지(78)씨는 자갈치시장에서 '첫 여성중매인'에다 가장 오래된 상인이다. 잘나고 많이 배우고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줄줄이 조사받고 구속되는 요즘 시절에 '뉴스'가 될 리 없겠지만, 중학교도 못 마친 그녀가 거래장부에 시(詩) 같고 유행가 같은 글을 적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으로 만나러 갔다.

'잠에 깨어 허둥대며 나간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세찬 바람 속에 내 몸을 맡긴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을 누르며/ 서글픈 마음이 가슴 깊은 곳으로 저며든다/ 푸르름을 뽐내던 나뭇잎도 변하고…/ 우리의 인생과 다를 게 뭣인가/ 억척같이 살아온 젊은 그 시절/ 허공 저편에 맴돌뿐….'


여장부 같은 '자갈치 할매'를 생각했는데, 그녀는 키 작고 말씨는 순했다. 그녀는 시장에서 꼬막·전복·바지락 등 어패류를 도매한다. 그녀는 새벽 1시쯤 가게에 나오고, 보통 직장인들이 업무를 시작하는 오전 9시쯤 일이 끝난다. 이날 우리는 오후 2시쯤 만났는데, 그녀의 '시간'으로는 한밤중일 것 같았다.

"잠은 밤에 잡니다. 평생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새벽 1시에 나가는 것 말고는 남들과 똑같이 생활해요. 일 마치고 낮 시간과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다른 볼일도 봐야지요. 55년간 이렇게 버릇 되면 편해요.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시를 쓴다고요?

"나는 시 쓰는 걸 배우지도 않았고 장사하느라 책 볼 시간도 없었는데, 60대 후반부터 괴로울 때면 장부 귀퉁이에 하나씩 끄적거리면 마음이 편했어요. 그래 봐야 지금껏 여남은 편도 못 썼어요. 사실은 내 수기(手記)를 쓰고 싶었어요. 막상 쓰려고 하니 너무 길어요. 편지 한 장 쓰는 거면 몰라도, 몇 자 적어보다가 말았어요."

―무슨 내용을 쓰고 싶었습니까?

"내가 고생했던 얘기를요…. 여섯 살 때 도쿄에서 미(美) B-29가 폭탄(소이탄)을 머리 위로 쏟아부을 때 내가 울며불며 헤매다가 다음 날 새벽에 엄마를 찾았던 일, 그 뒤로 우리 가족이 여수로 돌아와 3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또 여순반란사건과 6·25를 겪었지요. 어려운 형편으로 중학교를 그만두고 이곳저곳 일하러 다녔던 얘기도 있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내 얘기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그녀는 스스로 수기 쓰는 걸 단념했지만, 대신 내가 간략하게 그녀의 삶을 적어보기로 했다. 자신의 주어진 삶을 너무 불행하게만 여기는 젊은 세대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로 들릴 것이다.

한순지씨는 “내가 했던 고생을 봉사로 풀었다. 빌딩 가진 사람보다 내가 더 부자”라고 말했다.
한순지씨는 “내가 했던 고생을 봉사로 풀었다. 빌딩 가진 사람보다 내가 더 부자”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그녀는 3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도쿄에 건너가 양복점을 했다. 그런대로 먹고살 만했지만, 1945년 봄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삶의 터전과 재산을 다 잃게 됐다.

"그해 7월 귀국선을 타고 돌아와 외할머니가 계신 여수에 정착했지요. 아버지는 3년 뒤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공산폭동사건)이 터졌어요. 공산 폭도들이 아버지 빈소까지 쳐들어와 영정을 발로 차고 집기를 빼앗던 장면을 잊을 수 없어요.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으로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손짓해서 나오라고 해서는 총살시켰어요. 내가 목소리를 낮춰 '오빠야, 키 좀 줄여라. 바싹 숙여라'고 울부짖었어요. 오빠나 동생이 그때 컸으면 다 죽었을 거예요.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입니다."

이런 일을 겪었던 오빠와 동생이 북한에 건너갔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두 살 위 오빠는 고학으로 서울서 대학 1학년을 다니다가 일본의 외삼촌에게로 갔다. 그 뒤 오빠는 외삼촌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북송선(北送船)'을 탔다. 전교 1등 하던 두 살 아래 동생도 대학 진학이 막히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나중에 동생 또한 조총련계 꼬임에 빠져 북송선을 탔다. 이 남매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40년이 지나서였다.

"2005년 '화상(畵像) 상봉'이 이뤄졌어요.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떨어지다가 이렇게 화상으로나마 된 거지요. 적십자사 사무실에서 엄마와 함께 모니터 앞에 앉았어요. 화면에 오빠와 동생이 같이 나왔어요. 동생이 먼저 '김정일 장군님이 잘해주기 때문에 이렇게 만날 수 있다'고 선전했어요. 오빠는 기자라고 했고, 동생은 무슨 회사에 있다고 했어요."

화상 상봉은 2시간 주어졌고 서로 울다 보니 한 시간이 지났다. 서로 안부 묻는 것 외에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고 한다.

"화상 상봉에서 '어쩌다가 북한으로 넘어갔느냐?'고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엄마는 한이 돼서 '꼭 아들을 만나고 죽겠다'며 버티다가 재작년에 102세로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한 번 상봉하면 다시 신청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빠와 동생을 그리워하다 나도 죽겠지요."

그녀는 1962년 스물세 살 때 부산으로 시집을 왔다. 동생이 일본에 밀항하기 전이었다. 그녀는 중매로 남편 될 사람을 만났을 때 "동생을 공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막상 시집와보니 시어머니가 고무 대야에 널빤지를 얹어놓고 생선을 팔고 있었어요. 시집도 겨우 입에 풀칠하기 바빴어요. 내가 '돌아가겠다'고 하니 남편이 무릎 꿇고 빌었어요. 너무 안쓰러워 떠나지 못했어요. 결혼하고부터 나도 선창가에 고무 대야를 들고 나앉게 된 거죠. 그때만 해도 자갈치시장 건물이 없었어요. 시장 건물을 갖춘 것은 1970년이었어요."

한순지씨

그녀는 당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붕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머리에 수건만 걷힌 채/ 비와 바람 속에서 손발이 터서 피가 나고/ 하루 또 하루가 지나고 오늘은 어떻게 지날까/ 다라이를 들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 가면서/ 살아온 발자취가….'

결혼 9년이 됐을 때 그녀는 이미 네 아이의 엄마였고, 배 속에는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남편과 같이 택시를 타고 자갈치시장으로 오던 중 버스와 충돌했다.

"나는 갈비뼈 열 대가 부러졌어요. 그렇게 중상을 입었는데 배 속의 8개월 아기는 살아 있었어요. 시장 상인들이 교대로 문병 와 '남편은 상태가 심해 대학병원으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아이까지 낳고 석 달 만에 퇴원하는 날 '남편 간병하러 가겠다'고 말하니, 그때서야 상인들이 사실을 알려줬어요. 남편은 사고 현장에서 이미 숨졌던 겁니다."

그녀는 서른두 살이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그렇게 알게 됐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눈물은 전혀 나지 않았어요. 그 뒤로도 나는 울어본 적이 없어요. 어린 다섯 자녀를 키울 생각만 해야 했으니까요. 그때까지 남편과의 시간은 정말 생각이 안 나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녀는 중매인이었던 죽은 남편을 이어받아 자갈치시장의 첫 여성중매인이 됐다. 새벽에 중매인 일을 마치고 나면 장 바닥에서 어패류를 팔았다. 그녀는 다섯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못 살 것 같아도 살아보니 살아지더라고요. 일 끝나면 얼른 집에 가 밥하고 밀린 빨래를 해놓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잤어요. 그러다가 자정에 눈뜨면 다시 시장으로 나오고, 지금까지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온 거죠."

―여자 혼자 몸으로 처음에는 막막했겠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어려서 그 죽을 만큼 힘든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더 이상 어려울 게 뭐 있겠나 싶었어요. 간이 많이 커진 거죠(웃음). 하지만 억척같이 살아도 욕심내지는 않았어요.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이웃 가게와 싸워 본 적이 없어요. 동료 상인들의 경조사가 있으면 내 장사는 뒷전으로 하고 나서서 도왔어요. 그러다 보니 '신랑도 없는데 저렇게 마음을 쓰나, 착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젊어서 재혼하라는 권유를 안 받았습니까?

"주위에서 '누굴 만나 볼래?'라고 했지만, 재혼은 생각도 못했어요. 내 아이 다섯을 누가 키워주겠습니까. 곁눈질할 수 없었어요."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자기 인생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자식들이 너무 착하게 커 줘서 내 인생에는 후회가 없어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도시락 한 번 못 사준 게 마음이 아프지요. 하지만 애를 먹인 아이들이 없었어요. 큰아들은 부산대를 나와 엄마가 고생한다고 이 일을 같이했어요. 지금 가게를 맡고 있어요. 둘째는 자갈치시장의 중매인을 이어받았어요."

그녀는 1970년 자갈치시장 건물이 생겼을 때부터 봉사모임 '일심회'를 조직해 작년까지 쭉 회장직을 맡았다. 군부대, 보육원, 장애인집 등을 찾아다녔다. 이런 활동으로 그녀는 '가슴이 따뜻한 자갈치 아지매상'과 구청장상, 부산시장상 등을 받았다.

"내가 어려울수록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렵게 살아온 시절에 대한 응어리가 맺혔을 거예요. 내가 했던 고생을 봉사로서 다 풀었던 셈이지요. 빌딩을 가진 사람보다 내가 더 부자예요. 사람이 죽을 때 빌딩을 갖고 갑니까.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가면 내가 최고 대우를 받지 않겠어요."

―요즘 힘들다는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세상살이가 어려운 거잖아요. 참고 살아야죠. 내가 겪었듯이, 참고 견디며 살다 보면 희망이라는 것도 비쳐요. 하여튼 우리는 인생을 다 살았고 젊은 세대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으니, 세상이 이들을 위주로 맞춰줘야지요."

―시장에는 언제까지 나갈 겁니까?

"당초 예순 살까지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죠.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지요. 하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뭐 합니까. 손자 손녀로부터 '할매가 새벽에 장사 나가네'라는 말을 들을 때는 부끄러워요. 할매 위신이 깎이잖아요."

그녀는 "요즘처럼 시끄러운 세상에 이런 기사가 나와봐야 볼 사람들도 없을 텐데 죄송하다. 부산까지 괜한 고생하며 내려오셨다"는 말을 반복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22/20170122019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