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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보다 먼저 맞춘 퍼즐, 진화론 항해는 이제 출발

최만섭 2017. 1. 14. 07:21

다윈보다 먼저 맞춘 퍼즐, 진화론 항해는 이제 출발

입력 : 2017.01.14 03:02

진화론 숨은 창시자로 꼽히는월리스의 국내 첫 번역서150년 前 말레이반도서 항해 탐사포유류·조류 등 수만 점 모아 기록진화론 논문의 탄생도 볼 수 있어

'말레이 제도'
말레이 제도|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지음|노승영 옮김|지오북|848쪽|3만6000원

2013년 1월, 런던박물관은 다윈 조각상 옆에 월리스의 초상화를 걸었다. 진화론의 숨은 창시자로 꼽히는 앨프리드 월리스(1823~ 1913·사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만에 되찾은 명예였다.


찰스 다윈을 지적 영웅으로 '숭배'하는 진화학자 서울대 장대익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소심한 천재'여서 다윈을 더 좋아한다고.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놓고도, 당대를 지배하던 '창조론'의 비난이 두려워 20년을 숨겼던 유약함. 하지만 월리스의 성격은 다윈의 강 건너편에 있었다. 당대의 오지(奧地)였던 말레이반도에서 8년을 보낸 그는, 1858년 현지에서 다윈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변종이 원형에서 끝없이 멀어지는 경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이 포함됐다. 종의 기원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기쁨에 들떠 논평을 부탁하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써내려간 10쪽짜리 논문. 화들짝 놀란 다윈은 자신이 쓴 에세이와 월리스의 논문을 그해 런던의 학회에서 함께 발표했다. 월리스의 순서는 자신의 뒤로 배치했다. 이듬해인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됐고, 후배들이 다윈의 이름을 더 크게 기억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앨프리드 월리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이 책 '말레이 제도'는 죽은 지 100년 만에 다윈 조각상 옆에 초상화를 걸 수 있게 된 진화론의 숨은 창시자, 월리스의 국내 첫 번역서다.

1869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1854년부터 1862년까지 8년을 말레이반도에서 보낸 월리스의 과학 탐사기이자 오지 여행기. 동시에 최초의 진화론 논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자연사학자의 고백록이자 간증기이기도 하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를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 독자라면, 월리스의 '말레이 제도' 역시 당신의 책장 소중한 위치를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말레이 제도는 지금 미·중 논쟁의 핵심 중 하나인 남중국해 인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2만개 섬으로 구성된 이 지역 주민 삶의 터전이다. 국지적 분쟁으로 더 익숙해 작아 보이는가. 동서 길이 6000㎞, 남북 길이 2900㎞의 세계 최대 군도(群島)다. 유럽 전체 길이와 맞먹고,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덮고도 남는다. 보르네오 섬 하나만 해도 영국 전체를 집어넣고도 남아 숲의 바다로 둘러쌀 수 있을 정도. 월리스는 이 종(種)의 보고를 신나게 뒤지고 다녔다.

물론 학자로서의 열망만으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열네 살 때 집안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불우한 소년 월리스의 1차 목표는 당시 빅토리아 귀족들의 취미였던 동물 수집을 위한 표본 조달. 60~70차례의 항해 탐사를 통해 곤충 수만 점, 포유류·파충류·조류·패류 12만5000점 등을 모았다. 생계가 우선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종을 발견할 때의 기록과 문장은 희열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오랑우탄, 열대 과일 두리안의 맛과 향기, 강렬한 색의 깃과 화려한 반사판을 가진 극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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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스는 유럽인 최초로 야생 상태 왕극락조를 발견했다. 완벽한 나선형 원반으로 돌돌 감긴 꽁지깃 두 가닥을 지닌 새. 그는“모든 생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 새를 보고 깨닫는다”고 했다. /네덜란드 화가 얀 쾰레만스의‘왕극락조와 열두가닥극락조’(1869)
보자마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비, 크로에수스비단제비나비의 묘사를 인용해 보자. "마침내 녀석을 잡았을 때 내가 느낀 희열은 자연사학자가 아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녀석을 그물에서 꺼내어 멋진 날개를 펼치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피가 머리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임박한 죽음을 예감할 때보다 훨씬 어질어질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그날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430쪽)

150년 전의 항해 탐사기를 왜 지금 읽어야 할까. 그는 단순한 박물지(博物誌)를 넘어, 이런 소회를 남기고 있다. 서구 사회는 지적 성취의 측면에서 야만적 단계를 뛰어넘었지만, 그에 부합하는 도덕적 진보는 이루지 못했다고. 오히려 막대한 빈곤과 범죄, 추악한 감정과 사나운 정념은 말레이반도가 아니라 서구를 '야만'이라 부르게 만든다고. 지금이라고, 같은 나라 안에서라고 다를까.

'말레이 제도'에는 국내 출판사 지오북이 직접 제작한 말레이 제도 전도가 포함되어 있다. 월 리스의 항해 및 탐사 경로와 그곳의 대표적 동식물이 포함됐다. 진화론의 창시자로 그를 인정하게 만든 논문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순진한 천재' 월리스는 '소심한 천재' 다윈과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윈을 높이 평가해 '다윈주의'라는 책을 월리스는 썼고, 다윈 역시 월리스가 만년에 정부 연금을 받도록 도왔다. 아름다운 1등과 2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