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05 03:12
턴테이블로 다시 만난 LP… 듣는 과정 너무 귀찮지만
1만원 티셔츠 같은 MP3나 기성복 같은 CD 사운드가 도달하지 못하는 세계 있어
음악 듣기의 즐거움 되찾아
턴테이블을 드디어 장만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턴테이블과 턴테이블용 앰프를 장만했다. LP를 들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LP를 시작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저 호기심으로 사모은 것들과 간간이 선물 받은 LP들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태어나서 처음 음악을 들은 녹음 저장장치 역시 LP였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여러 단의 검은색 기기들 맨 꼭대기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턴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 책장에는 두꺼운 정사각형 종이 포장들이 수십 장 있었다. 그 포장 안에는 지름 30㎝짜리 검은색 플라스틱 원반이 담겨 있었다. 그 원반을 꺼내거나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행위는 가족 중 오로지 아버지 몫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접한 뒤 라디오를 듣게 됐고 나만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게 된 다음에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 이후 용돈을 모아 CD 플레이어를 사면서 CD를 모으기 시작했고 좀 더 커서는 월급을 모아 이른바 '하이파이 오디오'라는 것을 마련하게 됐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모든 음악은 CD로만 들어왔던 것이다.
'국내 마지막 LP 공장 서라벌레코드 문 닫아'라는 기사를 쓴 것이 2004년이다. 그때 이미 LP는 조금씩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나 주문량이 너무 적어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던 서라벌레코드는 고철 값에 LP 기계들을 팔아 치우고 폐업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LP는 전 세계적으로 다시 각광받는 음악 매체가 됐다. 우리는 10년 뒤를 내다볼 수 없이 팽팽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음악을 들은 녹음 저장장치 역시 LP였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여러 단의 검은색 기기들 맨 꼭대기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턴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 책장에는 두꺼운 정사각형 종이 포장들이 수십 장 있었다. 그 포장 안에는 지름 30㎝짜리 검은색 플라스틱 원반이 담겨 있었다. 그 원반을 꺼내거나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행위는 가족 중 오로지 아버지 몫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접한 뒤 라디오를 듣게 됐고 나만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게 된 다음에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었다. 이후 용돈을 모아 CD 플레이어를 사면서 CD를 모으기 시작했고 좀 더 커서는 월급을 모아 이른바 '하이파이 오디오'라는 것을 마련하게 됐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모든 음악은 CD로만 들어왔던 것이다.
'국내 마지막 LP 공장 서라벌레코드 문 닫아'라는 기사를 쓴 것이 2004년이다. 그때 이미 LP는 조금씩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나 주문량이 너무 적어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던 서라벌레코드는 고철 값에 LP 기계들을 팔아 치우고 폐업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LP는 전 세계적으로 다시 각광받는 음악 매체가 됐다. 우리는 10년 뒤를 내다볼 수 없이 팽팽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턴테이블 장만을 망설였던 것은 그 기기가 엄청난 고가(高價)여서도 아니고 갖고 있는 LP가 너무 적어서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MP3로 음악 듣는 시대에 물리적 형태를 띤 CD를 듣는 것만도 충분히 아날로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타임스에서 "LP가 음악의 미래"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는 한 LP 제작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LP는 순수한 사운드, 다시 말해 음악가가 들려주려고 하는 바로 그 음질을 구현해 줍니다. LP 음악은, 음악 중에서도 최고급 상품인 셈이지요." 용산 전자상가로 달려갔다.
우리집 거실에서 듣는 LP 사운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기대를 뛰어넘는 깊이와 너비가 그 검은 원반에 새겨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MP3는 소리도 아니었고 CD 사운드는 대량 생산 느낌이 물씬했다. 옷으로 치면 MP3는 1만원짜리 티셔츠, CD는 기성복 정장, LP는 소공동에서 맞춘 예복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LP를 너무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고등학생 때 용돈으로 샀던 LP들은 하나같이 '빽판'이라고 불렀던 해적판 음반들이었다. 그래서 LP를 떠올리면 지지직 하는 잡음이나 판이 튀어 제자리를 맴돌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CD와 LP 모두 갖고 있는 앨범, 이를테면 찰리 헤이든과 팻 메시니 협연 앨범 '비욘드 더 미주리 스카이'를 여러 번 번갈아 들어봤다. LP는 CD가 들려주지 못하는 콘트라베이스와 기타 울림통의 공명(共鳴)을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몇 년 전 선물 받은 조용필 첫 독집 '여학생을 위한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도 들어볼 수 있었다. 1972년 조용필이 통기타 반주로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며 당시 스물두 살 조용필이 왜 각별히 여학생을 위한 앨범을 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불행히도 LP를 듣고 싶어 빨리 퇴근하던 날들은 며칠 가지 못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LP 듣는 과정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었다. LP는 한 면에 길어야 20여분, 짧으면 15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바늘을 다시 처음으로 옮겨놓거나 음반을 뒤집거나 새 음반을 올려놓아야 했다. CD는 한번 걸어놓으면 1시간 이상 들을 수 있고 리모컨으로 간단히 무한 반복시킬 수도 있다. CD를 듣다가 잠드는 일도 많았지만 LP는 틀어놓고 잠들만 하면 바늘을 옮겨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LP를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커다란 재킷에 담긴 음반을 꺼내 플레이어에 올리고 톤암을 옮겨 바늘을 올려놓는 일, 그러고 난 뒤 재킷 안쪽 사진들을 보고 해설지를 읽는 행위의 소중함을 LP가 다시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다시 MP3로 음악 듣는 풍경이 달라지면서 한결 편해지긴 했으나 그만큼 음악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적어졌고 모든 음악은 귓등을 흐르는 배경음악이 됐다. LP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 듣기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
우리집 거실에서 듣는 LP 사운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기대를 뛰어넘는 깊이와 너비가 그 검은 원반에 새겨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MP3는 소리도 아니었고 CD 사운드는 대량 생산 느낌이 물씬했다. 옷으로 치면 MP3는 1만원짜리 티셔츠, CD는 기성복 정장, LP는 소공동에서 맞춘 예복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LP를 너무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고등학생 때 용돈으로 샀던 LP들은 하나같이 '빽판'이라고 불렀던 해적판 음반들이었다. 그래서 LP를 떠올리면 지지직 하는 잡음이나 판이 튀어 제자리를 맴돌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CD와 LP 모두 갖고 있는 앨범, 이를테면 찰리 헤이든과 팻 메시니 협연 앨범 '비욘드 더 미주리 스카이'를 여러 번 번갈아 들어봤다. LP는 CD가 들려주지 못하는 콘트라베이스와 기타 울림통의 공명(共鳴)을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몇 년 전 선물 받은 조용필 첫 독집 '여학생을 위한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도 들어볼 수 있었다. 1972년 조용필이 통기타 반주로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며 당시 스물두 살 조용필이 왜 각별히 여학생을 위한 앨범을 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불행히도 LP를 듣고 싶어 빨리 퇴근하던 날들은 며칠 가지 못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LP 듣는 과정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었다. LP는 한 면에 길어야 20여분, 짧으면 15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바늘을 다시 처음으로 옮겨놓거나 음반을 뒤집거나 새 음반을 올려놓아야 했다. CD는 한번 걸어놓으면 1시간 이상 들을 수 있고 리모컨으로 간단히 무한 반복시킬 수도 있다. CD를 듣다가 잠드는 일도 많았지만 LP는 틀어놓고 잠들만 하면 바늘을 옮겨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LP를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커다란 재킷에 담긴 음반을 꺼내 플레이어에 올리고 톤암을 옮겨 바늘을 올려놓는 일, 그러고 난 뒤 재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