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8.27 03:08
['잡 노마드' 시대가 온다] [5·끝]
이것만 바뀌면… 한국도 글로벌 '잡 노마드' 聖地 된다
- 이력서는 '빈칸 채우기' 경쟁
"자동차 엔지니어 꿈꿨는데 스펙 쌓으려 억지로 어학연수"
- 갑질 면접… 性차별 질문도
"서른에 신입 지원했다고 면박, 임신하면 관둘거냐고 묻기도"
- 업무 능력으로만 평가했으면
"화장 안 했더니 외모 지적하고 성형하라고 폭언하는 상사도"

"그래픽 디자이너를 뽑는데 정작 중요한 포트폴리오는 안 보고 토익 점수와 자기소개서만 요구하더라고요."
서울 한 사립대 미디어학과를 나온 남궁고은(29)씨는 졸업 후 구직 활동을 하면서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지원한 기업들이 그래픽 디자이너의 실무 능력보다 "조직 생활 잘할 수 있느냐" "외국 경험은 있느냐" 등을 먼저 따진 것이다. 남궁씨는 1년간 여러 회사에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2014년 말, 유럽의 웹 디자인 회사 20여 곳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곧 네 곳에서 만나보자는 연락이 왔다. 이들은 남궁씨의 포트폴리오와 실무 경력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2015년 1월 남궁씨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IT·게임 기업에 최종 합격했다. 2년째 네덜란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아침 10시까지 출근해 8시간 근무하고, 주 1회는 재택근무한다. 그는 "국내 취준생들이 토익 점수 올리느라 고생할 시간에 차라리 실무 능력 향상에 더 집중한다면 기업에도 이득일 텐데, 왜 헛일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삼녀' 양산하는 한국 채용 문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취업한 '잡 노마드'들은 "국내 구직 활동이 유쾌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직무와 무관한 고(高)스펙을 강요하고 '갑질'에 가까운 면접 등 한국 기업 특유의 채용 문화에 질려 해외로 떠났다는 것이다.
수도권 국립대를 나온 김모(25)씨는 이른바 '인삼녀'다. 인턴만 세 번 한 여자란 뜻이다. 대학 4학년에 여행사 인턴을 했는데, 졸업 후 취업이 늦어지면서 그냥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외국계 기업과 공공 기관에서 또 인턴 생활을 했다. 김씨는 "국내 기업 이력서는 '빈칸 채우기 경쟁'이라 지원자가 인턴이든 어학 연수든 무엇이든 해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올해 초 호주의 한 식품 회사에 취업했다.
멕시코에서 자동차 엔지니어로 취업한 김준환(29)씨도 대학 4학년 때 '스펙' 걱정에 호주로 2개월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그는 "주변에서 '어학 연수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해 등 떠밀리듯 다녀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베트남 섬유업체에 취업한 조승우(32) 씨는 "나이 서른이 넘어 신입 직원 채용에 지원하자 능력과 무관하게 나이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면접 단계에서 고질적 '갑질'도 잡 노마드에겐 좋지 않은 기억이다. 중동 항공사에 다니는 이모(26)씨는 국내 구직 활동 당시 한 대기업 면접에서 "임신하면 그만둘 거냐"는 질문을 받고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만 해도 채용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고 잡 노마드들은 전한다. 일본 돗토리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배지영(31)씨는 "일본 이력서의 자격증 게재란은 두 칸뿐"이라며 "대신 대학교 전공과 논문은 뭘 썼는지 등에 대해 꼼꼼히 적어 실무 능력을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 IT기업에 입사한 곽모(26)씨는 "입사 때 5단계에 걸쳐 면접했는데 회사가 세심하게 지원자를 파악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이'잡 노마드'의 선호지 되려면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해외로 이직한 잡 노마드들 역시 한국을 떠난 이유가 한국 기업 문화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국내 대기업을 그만두고 네덜란드 컨설팅 회사에 입사한 곽아영(28)씨는 "한국에서 사원으로 일할 때 사소한 결정도 대리·과장·부장·상무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았다"면서 "자율권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국내 IT 기업에서 싱가포르로 이직한 김모(26)씨는 한국에 있을 때 화장하지 않고 출근했다가 상사로부터 "너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쌍꺼풀은 좀 (수술)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한국에서는 외모 때문에 업무와 상관없는 '폭언'도 심심찮게 들었다"면서 "해외 기업으로 이직한 후 비로소 업무 역량으로만 평가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이 밖에 잡 노마드들은 한국 기업의 ▲회식·야근 강요 분위기 ▲경직된 위계 질서 ▲업무 역량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평가 ▲스펙·간판만 중시하는 인사 문화 등을 단점으로 꼽았다. 전인식 대한상공회의소 기업문화팀장은 "지금은 우리 청년들이 해외에 잡 노마드로 나가지만, 해외 청년들이 우리나라 기업에 취업하려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