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朝鮮칼럼 The Column] 봄, 혁명, 그리고 선거

최만섭 2016. 4. 6. 22:11
  •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입력 : 2016.04.06 03:20

이번 총선은 '컬러풀'한 선거
색깔 다른 인물 영입한 정당 간 크로스오버 현란
'옷벗김' 당한 후보의 개인기 경쟁도 화려
무채색 정치판에 '혁명' 싹트나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봄은 혁명처럼 온다. 무채색의 대지에 점점이 돋아나는 연두와 땅속에서 피를 끌어올린 듯 진분홍 꽃들이 피어나 세상의 색을 바꾼다. 겨울의 칙칙함을 덮고 새 세상을 펼친다.

그래서인가, 봄은 실제 혁명의 계절이다. 3·1운동과 4·19혁명,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휘황한 봄기운 속에서 탄생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무장 동학포고문'을 선포해 민간의 봉기를 호소한 것도 1894년 4월의 일이다. 현대사가 요동친 1980년에는 민주화의 기회를 엿보았던 '서울의 봄'이 있었다. 어느 혹독한 겨울날 우리 곁을 떠난 뜨겁고 젊은 생명(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그해 봄의 숙성을 거쳐 6·29 선언을 이끌어낸 민주화 운동으로 부활했다. 이 땅의 민주화는 그런 봄들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졌다.

4월을 뜻하는 영어의 라틴어 어원은 '(새 세상을) 연다(aperire)'이다. 그 말 그대로 나라 밖에서도 혁명과 봄은 친한 짝으로 붙어 다닌다. '프라하의 봄'이 그랬고 '아랍의 봄'이 그랬다. 프라하의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자유와 민주 노선을 제안하는 강령을 발표한 게 1968년 4월의 일이다. 볼셰비키혁명의 불을 댕긴 러시아 페테르그라드의 노동자 봉기는 1917년 3월에 일어났다. 그해 4월 레닌은 '자본주의 타도 없이 종전(終戰)은 불가능하다'는 등의 '4월 테제'를 발표했고, 5월에 트로츠키가 힘을 보태면서 볼셰비키 세력이 기반을 다져갔다. 프랑스혁명을 촉발한 '전국신분회'는 1789년 5월 루이 16세가 소집했는데, 그때 평민 대표들은 귀족과 성직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를 구성했고, 두 달 후 역사를 뒤흔들어 놓는다.

서양사에서 매우 특별한 해로 기록되는 1848년엔 유럽 각국에서 낡은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독립된 민주국가로 가기 위한 혁명의 바람이 연쇄적으로 불었다. 그 사건을 '국가의 봄(Spring of Nations)' 혹은 '인민의 봄(People's Spring)'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봄은 혁명이 일어나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메타포(은유)이기도 하다.

일주일 후 치러질 20대 국회의원 선거 주변의 다양한 군상과 잡음에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보듯 색의 향연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컬러풀'한 선거가 또 있었을까 싶다. 정당의 상징 색이 거리마다 너울대기 때문이 아니다. 색깔이 다른 인물을 영입한 정당 간의 현란한 크로스오버, 강제 옷 벗김을 당한 후보들의 화려한 개인기 경쟁, 뻔한 선거판에 제3의 색을 보태려고 분투하는 신생 정당이 뿜어내는 기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혹시 이들이 무채색의 정치판에 점점이 피어난 혁명의 전령사는 아닐지,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모든 혁명은 '앙시앵레짐(낡은 체제)'에 대한 반작용이다. 앙시앵레짐의 으뜸은 '자기 정치 금지령'을 내린 박근혜 대통령일 것이다. 정치인에게 색깔과 향기를 버리라는 요구는 마치 사업가에게 돈 벌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혁명에도 조연이 필요하다. 그런 대통령의 뜻을 일부 집권 세력이 '존영' 받들어 모시듯 눈감고 수행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꽃망울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노 패권주의라는 또 다른 앙시앵레짐은 아예 텃밭의 재구성을 가져올 조짐이다.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떨어져 나와 새 땅에서 싹을 틔웠는데 이제 두 달밖에 안 된 그 나무에서 꽃이 피려고 한다. 남은 이들은 눈치 빠르게 당명을 바꾸고 자신을 덧칠해줄 외부 인사들을 영입하며 일선 후퇴하는 모습을 연출했으나 숨어 있던 강성파가 얼굴을 드러내며 밑그림을 드러냈다.

양대 앙시앵레짐은 다른 것을 품지 못하는 좁은 국량(局量)으로 한국 정치의 확장성을 막았다. 민주 정당의 절차적 정당성은 사라지고 대통령을 위한, 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패권 놀음에 몰두하는 후진성을 나타냈다. 국민은 그 모든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건 '내 정치'는 폄훼되고 '우리 정치'와 '보스 정치'를 우선하던 정치판에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를 고민하는 후보들이 많아지는 건 반갑다. 자신의 가치 지향점과 비전을 부단하게 국민과 소통하는 자유로운 정치인이 더 나와야 한다. '배신' '살생부' '보복 공천' '파당' 같은 전근대적 용어가 악순환하는 패권주의 정치에서 국민과의 연대를 최우선으로 하는 개인 정치, 그런 개인들이 뜻을 합친 가치 정치로 이행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심지 굳은 그들이 살아 돌아와 지금의 초심으로 민주 정당정치의 새판을 짰으면 한다. 그래야 경제도 살고 통일도 산다.

혁명은 시작보다 완수하는 게 더 어렵다. 혁명의 궁극적 완성은 시민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투표하려 한다. 봄이니까. 혁명하기 딱 좋은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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