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130년 전의 원세개를 떠올린 이유
입력 : 2016.03.12 03:00
과거 시험에 두 차례나 낙방한 스물셋 원세개(袁世凱)가 역전의 기회를 잡은 곳이 조선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조선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청나라는 오장경(吳長慶)의 인솔 아래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백수였던 원세개는 아버지 친구였던 오장경의 부하로 조선에 왔다. 공부는 뒷전이지만 무예에는 열심이었던 원세개는 곧 능력을 인정받았다. 임오군란 책임자로 지목된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고, 대원군 세력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2년 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창덕궁에 진입해 고종을 '보호' 조치하면서 일본군(軍) 지원 아래 개화파가 단행한 정변을 무산시켰다. 이듬해 말 원세개는 청의 실력자인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 지휘를 받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에 임명됐다. 그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청의 세력이 꺾일 때까지 '조선의 총독'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상전(上典)' 노릇 하는 원세개 탓에 고종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나라를 견제하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눈치 챈 원세개는 "병사 500명만 있으면 국왕을 폐할 수 있다"며 고종을 압박했다.
원세개가 조선에서 활약한 12년은 한·중·일이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시간과의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였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원세개는 조선이 외교사절을 서구에 보내는 것까지 간섭하면서 발목을 잡았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와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중국은 사실상 유일한 종속국으로 남아 있던 조선을 제국의 울타리 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속방(屬邦)의 내치(內治)와 외교의 독자성을 보장해온 전통적 중화 질서에서 보면, 한참 빗나간 일탈 행위였다.
屬邦속방 -속방-屬 무리 속, 이을 촉-邦 나라 방-종속국(從屬國)
이 때문에 학계에선 청나라가 서구 제국을 본떠 조선을 '2류 제국주의'의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하루빨리 부국강병을 이뤄내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서 벗어나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원세개는 근대국가 건설의 발목을 잡은 '원흉'이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130년 전 원세개의 행적을 들춰낸 이유는 얼마 전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의 '비(非)외교적 폭언' 때문이다. 추 대사는 사드(THAAD)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한·중 관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협박했다. 외교적 수사(修辭)를 깡그리 무시하고, 직설적으로 양국 관계 파괴를 들먹인 추 대사의 발언은 구한말 원세개의 오만을 떠오르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물론 원세개의 내정 간섭은 추궈훙 대사의 무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원세개는 '점잖게' 경고 정도 한 게 아니다. 직접 군대를 동원해 고종을 폐위하려 했고 조선 위에 군림했다. 분명한 것은 추 대사의 '폭언' 같은 게 되풀이되면, 한국 국민은 조건반사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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