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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 核에 당한 뒤 종이학 1000마리 접은들 뭐 하나

최만섭 2016. 2. 13. 10:05

[송희영 칼럼] 核에 당한 뒤 종이학 1000마리 접은들 뭐 하나

  • 송희영 주필

입력 : 2016.02.13 03:20

우리 GNI 북한의 44배지만 경제가 군사적 우위 보장 못 해
南 경제성장 열매 따먹는 사이 北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
핵 한 방이면 서울 잿더미인데 가진 자들이 내부의 敵 될 것

송희영 주필
송희영 주필
경제력은 한 나라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자산이다. 한국은행 통계로는 한국은 북한보다 국민총소득(GNI)이 44배나 많다. 1인당 소득도 21배나 높다. 어떤 기준에서 보든 남과 북의 경제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력이 강하다고 해서 항상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경제력을 믿다가 당하는 나라가 역사에 수없이 많다. 19세기 초 중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이었다. 세계 경제(GDP)의 33%를 차지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대포에 맥없이 무너졌다. 그때 영국 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안팎이었다.

GDP-[ Gross Domestic Product음성듣기 ]-'국내총생산'을 말한다.


외국인이든 우리나라 사람이든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나라 국경내에 이루어진 생산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국내총생산(GDP)은 한 나라의 영역 내에서 가계,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 주체가 일정기간동안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창출한 부가가치 또는 최종 생산물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합계로서 여기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비거주자(외국인)에게 지불되는 소득과 국내 거주자가 외국에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수취한 소득이 포함된다.

국내총생산(GDP)은 현재 경제성장률 등 생산의 중심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시장이 국내로 제한되었던 시대에는 장소를 불문하고 경제성장률을 나타낼 때 우리나라 사람의 총생산을 나타내는 개념인 국민총생산(GNP)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특히 기업들)의 해외진출이 늘어나게 되면서부터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GNP의 정확성이 전보다 떨어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기업들의 소득창출액은 보다 신속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외국기업들이 우리나라 울타리 내에서 생산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얻게 되는 소득의 상당부분은 사실은 국내에서 지출되거나 재투자 된다. 여기서 주거하면서 먹고 살뿐만 아니라 얻은 소득도 국내에서 확대투자에 쓰거나 국내 자본시장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용수준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 즉 국내 실업률이 오르내리는 것도 우리기업들의 해외생산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국기업의 국내생산활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몇년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성장률을 따질 때 아예 GDP를 가지고 따지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OECD에 가입한 나라의 경제성장률 등을 따질 때 별도의 언급이 없더라도 GDP를 기준으로 따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도 현재 목표경제성장률 같은 것을 따질 때 GNP가 아니라 GDP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GDP [Gross Domestic Product]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영국의 경제 파워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870년경이다. 세계 경제의 9%를 차지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통치했다. 이때까지도 영국은 식민지 인도보다 경제력이 약했다는 것이 경제역사학자들의 결론이다.

1875년 일본은 조선에 개방을 요구하며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에 보냈다. 그 무렵 두 나라의 경제력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GDP)이 737달러(1990년 달러 기준), 조선은 604달러 수준이었다. 이런 격차로는 치욕의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선이 무릎을 꿇은 것은 일본의 군사력 때문이었다. 일본은 영국·미국의 첨단 기술을 도입해 군함을 새로 만들고 대포와 총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했던 것이다. 조선의 엘리트들이 산업혁명을 '오랑캐들의 사악한 짓거리'쯤으로 여겼던 것과는 달랐다.

우리는 해방 후 60년 이상 성장시대를 누렸다. 2세대가 온전히 경제성장의 혜택을 만끽했다. 그러다 보니 다수 국민은 지금의 풍요가 당연히 받아야 할 배당금으로 인식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이념 전쟁의 승리를 맛보았고, 탈북자들이 잇달아 들어오면서 완승을 했다는 자부심에 도취되고 말았다. 굶주린 동포들에게 따스한 햇볕을 쬐여주자는 시혜(施惠) 이벤트가 이어지면서 우쭐한 성취감은 최정상까지 도달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제 핵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수준이라고 말한다. 미사일은 한국제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올라갔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전투기를 갖고 있고, 아무리 성능 좋은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어도 조악한 핵폭탄 하나로 서울이 잿더미가 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건강한 경제력은 국민에게 맛있는 음식과 포근한 옷을 선물한다. 그러나 강한 군사력은 눈·귀·입으로 즐길 수 있는 선물을 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배부른 국민은 중요한 진리를 잊고 산다. 군사적 균형이 완전히 붕괴돼 적의 발밑에 깔릴 때까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킬 군사력을 키우지 않는다.

강한 경제력도 강한 군사력 앞에선 먼지처럼 하찮은 것이다. 경제적 풍요가 군사력으로 지켜지지 못할 때는 거꾸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불쏘시개가 되기 십상이다. 스페인의 피사로가 황금의 제국 잉카를 정벌할 때가 그랬다. 그는 대포·총으로 무장한 180명의 병사로 창과 활로 맞서는 수만 명의 잉카 전사(戰士)들과 싸웠다 월등한 무기 덕분에 승부는 쉽게 갈렸다. 피사로는 잉카의 왕을 체포한 뒤 방 하나는 금 덩어리로, 다른 방 2개는 은괴(銀塊)로 가득 채우라고 요구했다.

이런 국란(國亂)에서 잉카의 귀족들이 먼저 약해졌다. 피사로와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 왕을 구하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했다. 피사로가 원하는 만큼 금·은·에메랄드를 갖다 바쳤다. 그들은 피사로가 왕도 죽이고 황금의 제국을 해체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북핵 위기가 지속되면 우리 내부의 반발도 한층 거세질 것이다. 진보 세력이나 개성공단 피해 기업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지금껏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려온 세력들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50층 빌딩과 안락한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북과 적당히 대화·타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할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내부의 적이다.

일본 히로시마원폭기념공원에 가면 사다코라는 소녀의 동상이 있다. 사다코는 두 살 때 원폭을 맞아 그 후유증으로 10년 뒤 사망했다. 그녀는 1000마리 종이학을 접으면 소원을 이 룰 수 있다고 믿었다. 644개를 접다가 사망하자 나머지는 친구들이 눈물로 접어 함께 묻었다. 사다코는 애꿎은 원폭 피해자의 상징이 됐다.

당시 일본 해군과 국책연구소도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에는 '설마' 했다. 일본은 모든 것을 잃고 나서 핵의 공포를 맛보았다. 우리도 수많은 사다코가 나온 뒤에야 종이학을 접으며 함께 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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