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대로 알자

[윤평중 칼럼] 일본, 그 영원한 주홍글씨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최만섭 2015. 11. 6. 11:01

[윤평중 칼럼] 일본, 그 영원한 주홍글씨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입력 : 2015.11.06 03:20

우리 사회 가장 가혹한 낙인 '親日'… 선거철마다 '反日' 포퓰리즘 설쳐
안보·북핵·경제 등 韓·日 현안 산적, 정부는 과거사 감정싸움에 매몰
피해자 의식은 이제 넘어설 때… 친일 문제는 克日로 풀어야

윤평중 한신대 교수 사진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신숙주(申叔舟·1417~1475)는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유능한 지식인·관료였지만 숙주나물의 속설이 말하듯 정치적 변절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국제 정세에 밝은 외교와 국방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꽉 막힌 현재의 대일 관계를 푸는 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1471)'는 특히 유용하다. 중국을 관찰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비슷하게 소중한 통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1443년 27세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 교류 연혁과 외교 법제 등을 기록해 성종 때 낸 책이 해동제국기다. 책 서문에서 신숙주는 '외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이 아니라 내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을 한반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세력이 심히 큰' 나라로 규정한 후 미래의 안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게 최우선 과제임을 역설했다.

이는 100여년 후 임진왜란을 부른 조선의 국정 문란을 예견한 진술임과 동시에 2015년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팀의 총체적 난맥상에 대한 경고로 읽힐 수 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11월 2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아베 신조 총리의 정상회담은 2012년 5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이명박·노다 요시히코 회담 이후 무려 3년 6개월 만에 열린 개별 한·일 정상회담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만 한·미 정상회담 4차례, 한·중 정상회담이 6차례 열린 것에 비해 한·일 관계는 너무 막혀 있었다. 막대한 국익 손실을 가져온 경색 관계였다.

일본 왕복에 7개월이 걸린 험한 바닷길에 생명까지 건 신숙주라면 개탄해 마지않았을 일이다. 임종 무렵 신숙주는 성종에게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는 당부를 남긴다.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결코 실화(失和·관계가 나빠짐)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지금은 동북아 안보와 북핵, 경제 등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한·일 간 중대 현안이 쌓여 있는 긴급 상황이다. 과거사의 명분론과 감정싸움으로 대일 관계를 4년 가까이 허송세월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단견(短見)을 꼬집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에 이런저런 '주홍글씨'가 있지만 '친일'의 낙인이 가장 가혹하다. '친북'이나 '친독재'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도 그걸 옹호하는 소수 집단이 있는 반면 친일파를 지지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일본 트라우마'에 기초한 반일 감정이 한국 민족주의와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혹하기 짝이 없던 일제 식민 통치의 악몽은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식민 통치가 결과적으로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론(異論)에 수많은 한국 시민이 격렬한 실존적 반감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선거철마다 정치인이 포퓰리즘적 반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친일의 딱지는 사회적 사망증명서다. 친일파의 주홍글씨가 붙은 춘원 이광수의 유족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민족주의의 바탕에 있는 피해자 의식은 이제 넘어설 때가 됐다.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이룬 대한민국이 과거사 때문에 미래로 전진하지 못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폐쇄적 한국 민족주의와 극우적 일본 민족주의가 적대적 공존 관계를 이루어 두 사회의 퇴행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도 심각하다. 일본 아베 정권에 한·일 관계 경색의 결정적 책임이 있지만,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식민 통치에 대한 참된 사과를 끝내 거부한다면 그것은 결국 일본 국격(國格)의 치명적 결함이다. 과거를 사죄한 독일과는 달리 일본이 세계의 리더가 될 길에서 멀어진 것이니 일본의 부담으로 남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명분론을 절제한 건 잘한 일이다.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북핵 위기와 통일, 중국의 대국굴기를 감안하면 대일 관계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진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전된 방안을 제시한다면 우리도 전향적으로 대응하는 게 낫다. 친일 문제는 궁극적으로 극일 (克日)로 풀어야 마땅하다.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더 잘사는 건강한 민주사회가 될 때 친일의 악몽은 영구히 사라진다. 임진왜란을 성찰한 유성룡은 '일본과 가깝게 지내라'는 신숙주의 당부를 '징비록' 맨 앞에 실었다. 피와 눈물의 당부는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일본에 덧입힌 주홍글씨를 벗겨 내 동등한 이웃 나라로서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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