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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이슬람교·기독교 간 200년 혈투… 각종 문물도 전해졌죠

최만섭 2022. 4. 27. 04:58

 

[숨어있는 세계사] 이슬람교·기독교 간 200년 혈투… 각종 문물도 전해졌죠

입력 : 2022.04.27 03:30

십자군 전쟁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 그곳에 있던 이슬람교도·유대교인 등을 학살한 모습을 그린 그림. 이들은 이런 학살을‘신의 심판’으로 부르며 미화하기도 했어요. /위키피디아
동(東)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에서 성지 참배를 둘러싸고 최근 갈등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 사원에서는 이슬람교도에게만 예배가 허용되는데, 유대인들이 자신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이곳에 대거 방문하자 이슬람인들이 항의한 거예요.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언덕은 유대인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과거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파괴한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 터가 있던 곳이라 '성전산(聖殿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유대인 왕국의 '위대한 국왕'으로 여기는 다윗이 세운 도시로, 수많은 유대교 사원의 폐허가 있는 곳이기도 해요.

예루살렘은 과거부터 이슬람교·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성스러운 도시'로 여겨졌어요. 이 때문에 과거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답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1077년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갈등이 폭발하게 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이 도시의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곳"이라며 예루살렘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왔어요. 이슬람교인과 기독교인, 유대교인 모두에게 '성지'인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이에 1095년 11월, 당시 교황이던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광장을 메운 군중에게 이런 연설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이 말과 함께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고도 했어요. 이후 200년 가까이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됩니다.

8만명 참가한 제1차 십자군 전쟁

유럽 여러 나라의 귀족과 기사들은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어요. 그중에는 7년 동안의 흉년으로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이나 동방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영주 등도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조직된 제1차 십자군이 1096년 프랑스·이탈리아·서부 독일에서 각각 출정하게 됩니다. 약 8만명 정도가 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돼요.

이들은 붉은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가슴에 달고 '성전(聖戰)'에 나섰어요. 십자군들은 촘촘한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쇠사슬 갑옷 '호버크'와 강철 갑옷, 투구 등으로 무장했는데 화살도 튕겨낼 정도였다고 해요. 이슬람교도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6주 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투 끝에 예루살렘은 1099년 십자군에 의해 함락됐습니다.

그런데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했지만 이후에도 예루살렘에 있던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유대교인 등 수만 명을 학살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학살을 '신의 심판'이라고 부르며 미화하기도 했죠. 1차 십자군은 약 3년에 걸쳐 예루살렘 주위의 땅을 차근차근 점령하며 이곳에 여러 개의 작은 왕국도 세웠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렘을 되찾을 기회를 계속해서 노리다 마침내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인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됩니다. 88년간 기독교 세력이 지배했던 예루살렘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다시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간 거예요. 이후에도 교황과 유럽의 영주들은 8차 십자군까지 조직하며 예루살렘 원정에 나섰지만, 다시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어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충돌과 교류

11세기 말부터 200년 가까이 이어진 1~8차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의 교류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십자군이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쇠퇴했던 지중해의 해상 운송과 무역이 부활한 거예요. 이를 통해 서유럽에는 인도·중동 등의 물건뿐 아니라 문화 또한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인도에서 유래한 아라비아숫자가 유럽 지역으로 전파됐고, 연금술·점성술 같은 분야도 수입됐어요. 유럽은 이를 연구하며 각종 천문 관측 기구를 발전시켰어요.

철학 분야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슬람 문명은 로마가 멸망한 뒤 로마가 받아들였던 그리스 학문이나 철학 등을 아랍어로 번역하며 독창성을 가미했는데요. 예컨대 이슬람의 학자들은 750~900년 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아랍어로 번역한 뒤, 12세기까지 이 사상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 놓기도 했어요. 유럽인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고전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며 대거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며 잔인한 학살을 자행한 것과 달리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1138~1193)은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관용의 정신을 보여줬다고 해요.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약 1만5000명의 기독교인들이 항복하고 몸값을 내면 풀어줬고, 가난한 이들이나 노인들에게는 몸값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슬람 병사들의 기독교인 학살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했죠. 이 때문에 서양 문학작품에서는 살라딘을 인자한 인물로 그리기도 했어요. 특히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는 1300년대 초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집필한 '신곡'에서 살라딘을 소크라테스·플라톤과 함께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시켰답니다.
 이슬람의 지배자인 술탄 살라딘이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은 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이던 우르바노 2세의 연설로 시작됐어요. 사진은 교황이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최근 성지 참배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 동(東)예루살렘의‘알아크사 사원’. /위키피디아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