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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이야기] 기사·수녀·상인 등 30여 명 순례자… 길에서 들려주는 저마다의 이야기

최만섭 2022. 4. 5. 05:19

[고전 이야기] 기사·수녀·상인 등 30여 명 순례자… 길에서 들려주는 저마다의 이야기

입력 : 2022.04.05 03:30

캔터베리 이야기

 1483년 출판된‘캔터베리 이야기’에 실린 목판화. /위키피디아
여러분은 모두 캔터베리로 가고 있습니다. (…) 가는 도중에 각자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석처럼 아무 말도 없이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정말 따분한 일입니다.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1340~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고지의 정점에 도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요. 중세 유럽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지요.

신분과 계층이 다양한 30여 명이 영국 템스강 남쪽 서더크 지역의 여관 타바드에 모입니다. 성지(聖地) 캔터베리로 가려는 순례자들이었어요. 이들은 12세기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토머스 베켓을 추앙했는데, 베켓은 생전에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어 고생할 때 도와준 '복되고 성스러운 순교자'였어요.

이곳에 모인 순례자들은 즐겁게 여행하고 싶었어요. 때마침 순례자 중 한 명인 여관 주인이 "순례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가장 좋은 이야기를 해 준 사람에게 우리 모두 돈을 내서 큰 축제를 벌여주자"고 제안해요. 기사·수녀·수사(修士)·상인·대학생·변호사·방앗간주인 등 신분과 계층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여행길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펼치게 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꾼은 기사였어요. 그는 고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모험과 정복 전쟁,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이 이야기는 기억해둘 만한 훌륭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랬어요. 수사는 "내 직분에 맞는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타락한 천사 루시퍼와 아담·삼손 등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각 지역 왕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줍니다.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지만 "박식한 사람들의 지혜를 능가"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건 식료품 조달인이었어요. 그는 그리스 신화의 신 포에부스(아폴로)가 말과 노래를 가르치려고 했던 까마귀의 이야기를 꺼내요. 까마귀는 원래 흰색이었는데,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해 주인 포에부스에게 흰 털을 모두 뽑히고, 노래하는 능력조차 잃게 됐어요. 식료품 조달인은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덧붙여요. "항상 말을 조심하도록 해라.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네가 험담이나 소문의 출처가 되지 않도록 해라."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미완성이에요.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고 끝나는 주인공이 있고, 결정적으로 누가 큰 축제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는지 밝히지 않아요. 그런데 그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분도 계급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점이에요. 옥신각신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좋은 평 한두 가지는 꼭 덧붙였어요. 우리 사회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좋은 점부터 찾아낼 수 있다면 더 희망 찬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