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반란군에 맞선 장교 5명, 74년만의 보훈
戰死 육사 동기·선배 유공자 등록
93세 최석신 장군 “이제 恨 풀었다”
“14연대 반란이 봉기·항쟁?
그럼 남로당 반란에 맞선 동료들은
뭘 위해 싸우다 죽은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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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이나 지났지만 이제라도 국가가 목숨 바친 동료들을 기억해줘서 고맙습니다.”
노병(老兵)의 입술이 떨렸다. 1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위패봉안관. 중위 유재환, 중위 김남수, 중위 김일득, 육사 6기 동기생 이름이 적힌 위패를 훑어보던 최석신(93·예비역 소장) 장군은 감정이 복받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동기생 셋은 지난 14일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전사(戰死) 74년 만에 날아온 소식이었다. 김일영 소령, 맹택호 중위(이상 일계급 추서)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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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장교 5명은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에 맞서다 전사했다. 지창수 선임하사 등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은 10월 19일 무장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들을 모두 죽이자’고 선동했다. 장교들은 보이는 족족 사살했다. 20명 넘는 장교가 목숨을 잃었다. 1대대장이던 김일영 소령은 반란을 진압하러 방에서 뛰쳐나오다 사살당했다. 소위 계급장 단 지 석 달도 채 안 된 6기생 7명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두 살 김일영 대대장을 비롯, 전사 장교 거의가 20대 초중반이었다.
“나도 그날 부대에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열아홉 살이던 최석신 소위를 평생 따라다닌 질문이다. 1948년 7월 28일 임관 후 14연대에 배속되자마자 김일영 1대대장으로부터 진해 포병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두 달 후 귀대했을 때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부대는 쑥대밭이 됐다. 14연대 반란군 잔여 병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연대는 해체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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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구였지만 74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여단 본부에 귀대 신고를 하러 갔어요. 흰 보자기로 싼 자그마한 유골함 16개가 있었습니다. ‘교육 잘 받고오라’며 전송하던 김일영 대대장, 함께 뒹굴고 고생하던 동료를 그렇게 만날 줄 몰랐어요.”
14연대 반란으로 전사한 장교 대부분은 1961년 11월 군사원호보상법 시행을 전후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1(1967년)에는 14연대 반란 전사 장교 21명의 명단이 나온다. 이 중 16명이 국가유공자가 됐고 유족들이 연금이나 복지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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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일영 소령 등 장교 5명은 유공자 등록조차 못 했다. 국가보훈처는 “유공자 등록은 유족 신청에 의해 이뤄지는데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이분들은 신청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김일영 소령과 김일득 중위는 각각 평남 강동, 함남 함흥이 고향이다. 당시 경비사관학교(옛 육사)엔 공산당 학정을 피해 월남한 이북 출신이 많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호국전몰용사공훈록’엔 김일영 소령과 맹택호 중위의 공적이 올라있고, 김일득 중위는 1950년 12월 화랑무공훈장까지 추서됐는데도 국가유공자 인정은 받을 수 없었다.
다행히 2016년 유족 신청이 없어도 국가보훈처 심사를 통해 유공자 등록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여순사건 전사자 현황을 추적해온 정일랑(80) 무공수훈자회 여수지회장은 14연대 장교 생존자인 최석신 장군과 함께 이들의 유공자 등록을 도왔다.
최석신 장군은 6·25전쟁 때 포병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동부 전선에서 싸우다 왼쪽 무릎에 포탄 파편이 박혔다. 3급 상이용사다. 여순사건·6·25전쟁을 거치면서 6기 동기생 234명 중 4분의 1이 넘는 60명이 전사했다. 합참전략기획국장, 한미제1군단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1975년 소장 예편 뒤 파나마·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그는 14연대 장교 중 마지막 생존자다. 14연대 ‘최후의 증인’으로 여순사건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14연대 반란을 ‘봉기’ ‘항쟁’으로 부르자는 얘기가 나온다면서요? 그러면 남로당 반란 세력에 맞선 동료들은 뭘 위해 싸우다 죽은 겁니까.”
☞여순사건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들이 주도한 무장반란으로 시작됐다.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 명령이 내려오자 지창수 선임하사 등 남로당 반란 세력은 ‘동족 살상하는 제주도 출병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지역 좌익 세력이 호응하면서 반란이 확대됐고,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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