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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최만섭 2021. 11. 4. 04:56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서울 종로구 견지동 NH농협 종로지점 건물은 1926년 ‘조선일보’ 사옥으로 지어졌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옥(1933), 1937년 이후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본사 사무실로 사용됐다. 대동광업 사장 이종만은 ‘소작농 없는 자작농의 조선’을 꿈꾸며 함남 영평금광 매각자본 155만원으로 농촌과 교육 갱생 사업을 벌였다. 해방 후 그는 금광이 있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수수께끼의 인물 이종만

‘남들은 이종만씨를 마치 조선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천만장자의 몸이면서 다 찢어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수 굴 속에 들어가 갱부(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빈민굴에 나타나 100원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돌아온다 하여 몬테크리스토 백작 모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세상 여러 십만 명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종만씨란 대체 어떠한 인물이며 그의 사업관, 황금관은 어떠한고 필자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삼천리’ 11권7호 1939년 6월호)

‘창랑객(滄浪客)’이라는 식민시대 잡지 ‘삼천리’ 기자는 1939년 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빈민굴에 적선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비유하며 그를 인터뷰했다. 이종만은 식민 조선 3대 금광왕으로 불리는 금광 갑부다.

그런데 이종만은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종만: 일본명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부했다.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을 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7월호 ‘삼천리’에 게재된 <지원병사 제군에게>라는 칼럼에 격려의 글을 실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발췌) 친일과 반일이 세상사를 재단하는 칼날로 변해가는 이 시대, 이종만 혹은 쓰키지로 쇼마의 일생을 보기로 한다.

이종만(1886~1977)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견지동 111번지 붉은벽돌집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이종만을 인터뷰한 곳은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 사무실이다. 사무실 주소는 경성 견지초(堅志町) 111번지다. 거기에는 붉은 2층 건물이 있고 현판에는 금색으로 회사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 건물은 ‘실로 조선일보가 앉았을 적에는 이상재 옹을 위시해 안재홍, 신석우, 유진태 등 한다 하는 거인(巨人)들이 드나들며 안팎으로 사회 일을 지휘하던 자리요, 훗날 중앙일보가 되면서 여운형, 최선익 등이 또한 천하를 논하던 곳’이다.(‘삼천리’, 앞 글)

1926년 ‘조선일보’가 네 번째 사옥으로 만든 건물이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휴간한 뒤 1937년 폐간됐다.

그 이후 해방 때까지 바로 이 이종만이 운영하는 ‘대동광업주식회사’가 건물을 인수해 사용했다. 매각 비용은 9만8000원이었다.(’삼천리’ 10권10호 1938년 10월호)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농협 건물로 사용 중이다.

광산업자 이종만의 오뚝이 일생

저 거인들이 거쳐 간 건물을 인수한 광산업자 이종만의 인생은 이러했다. 이종만은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반농반어의 마을인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종만은 ‘실로 언어도단인 병마절도사의 전횡을 그저 “양반은 지엄한 존재라 여기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던” 고향 사람들’을 기억한다.(1940년 4월 3일 ‘동아일보’)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이 된 1905년 이후 이종만은 대실패 연속의 인생을 살았다. 러일전쟁 군수품인 ‘빨간약’ 재료로 미역이 쓰인다고 해서 부산에 미역 도매상을 차렸더니 전쟁이 끝나버렸다. 그물을 사고 어선을 사서 명태잡이를 시작했다가 전복 사고로 명태를 다 수장시켰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무기 원료인 중석(텅스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강원도 양구에 중석광을 차렸다. 5만원(3030년 9월 현재 10억 원: 1914년 현재 쌀값 기준·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가까이 벌었나 싶었더니 전쟁이 끝나면서 중석값이 폭락했다. 빚을 갚고 또 거지가 됐다.

이어 목재상을 차렸더니 홍수에 목재들이 다 사라져버렸다.(이상 1937년 6월 10일 ‘조선일보’) 최창학, 방응모 같은 금광으로 성공한 사람이 잇따라 탄생하자 1928년 이종만 또한 함남 명태동에서 금광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1931년 겨울 동업자 사기극에 말려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진 돈은 27전이었다.

실패밖에 모르는 사업가 이종만은 또 금광업에 매달렸다. 1934년 이종만은 채산성 부족으로 방치된 함북 영평금광을 일본인에게서 450원에 사들였다. 2년 뒤 노다지가 터졌다. 1936년 한 해에만 40만원어치가 넘는 금이 채굴됐다. 그 돈으로 이종만은 역시 함남에 있는 장진금광 개발권을 사들였다. 한 해 채금량 140만원이 넘었다. 마침내 금광왕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것이다.

실패한 사업가의 상상초월 반전

위에 인용한 ‘삼천리’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말이 이에 미치매 나는 심중(心中)에 울었다. 왜 이리 이 사람을 늦게 만났냐고, 이분의 손목을 붓잡고 오래도록 울고 십헛다.’

왜 울고 싶었을까. 노다지가 터지고 딱 1년 뒤인 1937년 이종만이 그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찾아간 삼천리 기자 창랑객에게 이 천하갑부가 이리 말한 것이다. “이 사장의 자리란 것이 실상은 본의가 아닙니다. 나는 저 갱부들과 같이 굴속에 들어가 그네와 같이 일하고 그네를 가르치고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또 그가 소원이여요.”

 

인터뷰 2년 전인 1937년 5월 11일 이종만은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성에 있는 ‘천진루’라는 허름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이종만이 설명회를 여는 날이었다. 새 회사 이름은 ‘대동(大同) 농촌사’다. 이종만이 입을 열었다. “조선 인구 팔 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조선인 생활은 농촌에 달렸고 농민의 빈궁은 가장 우리의 관심할 바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금전을 잡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 갱생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드려보자고 계획을 했습니다.”(1937년 5월 13일 ‘조선일보’)

가진 돈은 모두 조선을 위해

450원짜리 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졸부 입에서 놀라운 발표가 줄줄 튀어나왔다. ‘155만원 가운데 50만원으로 ‘대동농촌사’를 만든다. 조선 6개 지역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권을 준다. 매년 수확량의 삼 할을 의무금으로 징수해 농지 추가 매입 비용으로 쓰고, 30년 뒤에는 의무금을 폐지한다. 교육, 위생, 문화 문제를 부락민이 자치한다. 교육시설을 만들어 농촌의 중추인 청년을 양성하겠다.’ 조선 농촌의 암(癌)인 소작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이상 ‘조선일보’ 위 날짜 등) 이종만은 농장용 토지 매입을 위해 100만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평금광을 판 돈 전액을 농촌 갱생에 쓰겠다는 발표였다. 쌀값을 기준으로 1937년 150만원은 현 시가 170억원이다.(2020년 9월 현재·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기자회견 이틀 뒤 이종만은 영평금광으로 가서 전 직원과 인근 마을에 12만원을 기부하며 석별식을 치렀다. 그달 28일 이종만은 고향에 보통학교 설립기금으로 1만5000원을 기부했다.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종만을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로 소개한 1937년 6월 10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db

또 일주일이 지난 6월 6일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자본금 300만원으로 장진금광을 비롯한 소유 광산을 운영할 이 회사는 광부 전원이 조합원이며, 이들은 임금은 물론 조합원으로 이익 배당을 받게 된다고 했다.(1937년 6월 9일 ‘조선일보’)

이종만은 더 이상 노다지 졸부가 아니었다. 그는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였고(6월 10일 ‘조선일보’), ‘가진 땅이 157만평에 불과한 것이 (조선 농촌이) 매우 섭섭해할 독지가’(1937년 9월 17일 ‘동아일보’)였다.

대동농촌사는 함남 영흥, 경기 연천, 평남 평원과 경남 하동에 집단농장 다섯 군데를 만들었다. 총면적은 750정보(225만평)였다. 이름은 농장이 아니라 ‘농촌’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가운데 ‘하동농촌’은 1940년 정식으로 이종만과 농민들 사이에 ‘자작농 계약’이 맺어졌다.(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호, 한국사연구회, 1996)

“같이 잘살 길을 찾고자”

이종만은 이어 1937년 10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한 평양 숭실학교를 120만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이 불발되자 이종만은 이듬해 평양에 ‘대동공전’을 설립했다. 이미 수십 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동안에도 고향과 경성에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친 이종만이었다.

어느덧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와 대동농촌사와 대동출판사와 대동공전을 운영하는 대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런데 이종만은 “2000만~3000만원이면 대학 하나 만들 수 있을 텐데 공업과 농업과 광업을 포함한 종합대학교는 꼭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왜? “다 같이 잘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소이다.”(‘삼천리’ 맨 앞 글)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인터뷰 기사 말미에 “손목을 붓잡고 울고 십헛다”라고 쓴 이유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종만의 월북과 ‘친일인명사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금광업에 대한 총독부 지원이 중단됐다. 금광을 모체로 한 이종만의 ‘대동’ 사업체 또한 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 기부 활동을 시작한 이종만은 1940년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소위 ‘친일 활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구와 함께 참가했다 돌아온 이종만은 그해 가을 다시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장진금광이 함경도에 있었다. 이후 이종만은 북한 정부 광업부 고문이 되었고, 1977년 죽었다. 그가 만든 대동공전 후신이 김책공과대학이다. 이종만은 지금 ‘자본가’로 유일하게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로 규정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험한 시대를 살아간 한 기업가 이야기 끝.

 

#땅의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