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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216]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최만섭 2021. 9. 4. 05:53

[백영옥의 말과 글] [216]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09.04 00:00

 

이렇게까지 책을 읽지 못한 적이 없다. 작년에 ‘올해의 책’을 꼽아 달라는 한 서점의 전화에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난독증인가 싶어 괴롭다가 요즘 예전에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밑줄 옆에는 가끔 과거의 코멘트들이 적혀 있다. 활자들은 이리저리 휘갈겨 있어서 나만이 그 문장을 적던 때의 흥분을 알아챌 수 있다. 책 속의 밑줄도 종종 내게 말을 건넨다.

 

나를 돌보는 법에 대해 많이 썼다. 고이 모셔놓은 손님용 찻잔을 꺼내 자신을 위해 쓰라거나, 아침에 쓰는 감사 일기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해 괴로운 날을 보내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집을 청소한다. 쓰레기를 버리고 침대를 정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귀찮고 수고로운 일이지만 지친 몸으로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정돈된 집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다. 이렇게 하면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를 환대한다는 느낌이 든다. 가령 오늘은 죽도록 힘들었지만 퇴근길 나를 위해 남겨놓은 마카롱이 있으면 보험에 든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

 

슬럼프나 우울감, 권태기는 늘 예고 없이 닥친다. 혼란스러운 내게 누가 손을 내밀 것인가. 바로 나다. 세상 많은 좋은 것들은 그 자신이 이미 수년 전에 ‘심어놓았던 것’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이며 선물이다. 그리고 이 격려의 본질은 ‘수고로웠던 시간들’이다. 귀찮고 힘들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내가 나를 위해 해왔던 것 말이다.

 

나는 위로나 성장을 재정의하고 싶어졌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꾸준히 했던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성장시킨다고. 심지어 실패마저도 그렇다. 거절당했던 작품이 계속 거절당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수없이 거절당했던 작품을 다시 고쳐 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의 나는 그러므로 과거의 나를 믿어야 한다. 세상이 시큼한 레몬을 건넸을 때,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함께 만든 친구가 나 아닌가.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과거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