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208] 선물에 대하여
입력 2021.07.10 00:00
치약을 선물받았다. 약속한 날을 잘못 기록한 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계면 활성제가 없어 유독 거품이 잘 나지 않는 이 치약은 색깔마저 보라색이라, 이를 닦고 보라색 거품을 뱉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친구를 생각했다.
4년 전, 나의 첫 번째 명상 수업에서 선생님이 내 준 숙제 중 하나는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장 정성스럽게 하기였다. 목록 중에는 ‘의식하면서 칫솔질하기’와 ‘의식하면서 밥 먹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습관적인 칫솔질을 ‘의식적’으로 바꾸자 명백히 깨달은 게 있다. 화풀이하듯 내가 너무 세게 이를 닦는다는 것이었다. 피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양치질이었다.
이를 닦으며 친구를 생각하다가 문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한 가지를 양치질에 덧붙이면 좋겠단 생각이 떠올랐다. 오프라 윈프리식으로 말하면 바로 ‘아하!’의 순간이다. 내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 즉 쓰지 않던 왼손으로 이를 닦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이를 닦는 시간이 자동 비행 모드처럼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일을 하도록 뇌를 훈련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김소연의 에세이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는 “선물은 주거나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되는 것”이란 문장이 있다. 선물을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닌 ‘되는 것’이라 달리 표현할 때, 우리는 “선물이 되는 사건, 선물이 되는 시간, 선물이 되는 사람, 선물이 되는 말, 선물이 되는 표정” 같은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말을 한가득 끌어모을 수 있다. 시인의 말처럼 방이나 부엌, 욕실처럼 내가 점유한 공간이 “그러한 사소한 선물이었던 사물들의 소근거림으로 둘러싸여”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 왼손으로 이를 닦는다. 별수 없이 느릿느릿 천천히 닦게 된다. 보라색 치약 거품은 어릴 적 자주 먹던 죠스바를 떠오르게 한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선물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를 계속 떠오르게 하는 것 아닐까.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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