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삶 그 자체… 온몸 세포가 살아나요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배우 김소진
입력 2021.06.15 03:00
지난 7일 만난 김소진은 “하고 싶다거나 자극을 주는 작품이 없어 반년쯤 쉬다 이 연극을 만났다”며 “한 인간이 주어진 삶을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며 싸워가는 과정이 내 모습 같아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배우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외향적이고 인터뷰도 거침없는 A그룹, 낯을 가리고 인터뷰가 연기보다 힘든 B그룹이다. 영화 ‘더 킹’ ‘마약왕’ ‘미성년’ ‘남산의 부장들’에 이어 올여름 개봉할 ‘모가디슈’까지, 최근 충무로에서 사랑받는 배우 김소진(42)은 아뿔싸, 진지한 B그룹에 속했다.
이 인터뷰는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22일부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를 앞둔 김소진은 사전에 건넨 질문들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했다. 지난 7일 배우를 만나자마자 그것들을 내버렸다. 그녀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부산까지 가려던 운전자가 경로를 이탈한 셈이다. 이날 나눈 대화는 90분 뒤 강원도 인제(배우가 10대를 보낸 곳)에서 끝났는데 어디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김소진의 독백을 옮긴다.
◇”그냥 내 느낌을 말하는 거야”
연극은 3년 만이에요. 원작(파스칼 키냐르의 동명 희곡)보다 대본을 먼저 봤는데 국내 초연이라 더 끌렸어요. 연습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우리가 처음이다 생각하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요. 잘 모르지만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주인공 시미언(정동환)은 실제로 새들의 노래를 악보로 옮긴 최초의 음악가예요. 사별한 아내가 사랑한 정원의 모든 소리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내레이터인데 그냥 읊으면 되는 게 아니었어요. 요것 봐라? 역시나 어렵습니다. 2주 남았으니 더 조져야죠. (조져요?) 버릴 건 버리고 짜임새를 단단하게.
시미언의 대사 중에 “그냥 내 느낌을 말하는 거야”가 좋아요. 솔직한 사람이 어느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처럼 들려요. 그 대사는 들을 때마다 제 안에 메아리처럼 맴돌아요(※김소진의 말투는 영화에서 속사포지만 현실에선 느렸다.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붙잡는 단어를 고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연습 장면 /세종문화회관
◇”연기는 내 숨을 쉬는 것”
자연의 소리를 저도 좋아해요. 바람 소리, 빗소리, 제주도에 눈 오는 소리…. 제주도 눈은 내리면서 얼어 무게가 느껴져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도 좋지요. (연습하는 동안 새롭게 들린 소리라면?) 진짜 정곡을 찌르는군요. 없었어요. 하하. 아직도 대사를 숙지하느라 허덕입니다.
정동환 선생님과 저는 무대에서 피아노도 연주해요. 얼마 전 음악 감독님한테 혼났어요. 피아노는 그렇게 건드리는 게 아니래요. 요즘 특훈(?)을 받고 있어요. 음악의 비중이 큰 연극이고 관객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저만의 호흡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기도 어떤 라인(line)을 배우가 연주하는 셈이잖아요. 저는 테크닉은 잘 몰라요. ‘내 숨을 쉴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해요.
배우로서 일방적으로 소비되고 싶지는 않아요. 내 에너지를 쓰면서 충전도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영화 연기와의 차이요? 음, 영화는 내 연기를 볼 수 있지요. 내가 저런 표정을 갖고 있구나, 저건 별로네, 저건 느낌이 좋네…. ‘미성년’에서 마지막에 딸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은 제 눈빛이 인상적이라 가끔 찾아봐요. (※집에 돌아와 ‘미성년’의 그 컵라면 장면을 돌려봤다. 배우가 온전히 그 인물로 존재한 순간이었다).
◇”초점 잃은 모습도 아름답다”
저는 일할 때만 에너지를 써요. 일이 없으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요. 그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고요. 전에는 생각 안에 답이 있다고 믿었어요. 하루에 열두 시간 온몸으로 생각만 한 적도 있습니다(웃음). 그러다 몸이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요가도 하고 몸을 쓰니까 활기가 생기고 마음이 편해져요.
20대 후반에 연극 한 편이 올라가는 과정을 스태프로 지켜보면서 알았어요. 연극은 삶이구나. 무질서하게 여러 고비를 넘기고 관객을 만나는 그 과정이 좋아 연극 하려고 배우가 됐어요. 인생은 한 번밖에 못 사는데 공연하는 동안은 누군가의 삶을 날마다 되살아내며 귀한 조언들을 얻으니 감사한 일이죠.
강원도 인제에서 10대를 보냈어요. 자연에서 해답을 얻곤 해요. 제주도 김영갑 갤러리에 갔더니 초점이 뭉개진 사진들이 걸려 있었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촬영하다 바람까지 담은 거예요. 위로를 받았어요. 너무 선명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자. 저렇게 초점을 잃은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구나.
저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요? (연필을 던지며) 소진아, 이거 하길 잘했다! 브라보!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연습 장면 /세종문화회관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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