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깊이 읽기] ‘서유럽 중심’을 넘어… 균형 잡힌 유럽史가 여기 있다

최만섭 2021. 3. 13. 09:01

[깊이 읽기] ‘서유럽 중심’을 넘어… 균형 잡힌 유럽史가 여기 있다

주경철 교수

입력 2021.03.13 03:00 | 수정 2021.03.13 03:00

 

 

 

 

 

노먼 데이비스의 유럽사 1~4|노먼 데이비스 지음|최재희 옮김|심산|각 2만5000원

노먼 데이비스의 ‘유럽사’는 사건 중심의 내러티브 서술 방식을 취하는 전통적인 개설서다. 최근 역사 연구가 지나치게 전문화·세분화된 결과 오히려 역사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개설서가 더욱 절실히 필요해졌다. 이 책은 그런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유럽 역사를 12개의 장으로 나누어 ‘환경과 선사시대’ ‘고대 그리스’에서 ‘유럽 통합’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시대 개념과 주제를 따라 서술해 간다. 우아한 스타일의 산문으로 박학한 지식을 풀어나가면서 넓은 조망을 제시하는 솜씨는 대가의 풍모가 역력하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책은 역사적 사실들을 시간순으로 적당히 나열한 교과서류의 역사책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와 같은 범범한 외양 아래 실로 파격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의 유럽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야심 찬 기획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유럽사 개설서는 말이 유럽사지 실은 ‘서유럽’ 역사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러시아, 비잔티움 등의 역사는 필요할 때에만 소환되고, 대개는 저급하고 야만적인 문화 혹은 위협적인 적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이 책은 그런 문제점을 넘어서서 서유럽과 동유럽을 가급적 균형 있게 서술하고자 하는 지극한 노력의 산물이다. 저자가 런던대학교 슬라브 및 동유럽 연구 대학의 폴란드사 교수라는 이력이 그런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황소로 변해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를 태우고 가는 모습을 묘사한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의 프레스코화. 유럽이라는 명칭은 에우로페에서 나왔다. 유럽은 동(東)에서 시작해 서(西)로 왔고, 그 전체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저자는 100쪽이 넘는 서론에서 유럽이 무엇이며, 유럽사는 어떠해야 하며, 그동안 유럽사 서술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다소 장황하게 추적한다. 지난 시대에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각을 지배했던 것은 저자의 명명에 따르면 ‘연합국의 사관’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려 했던 ‘유럽연합의 사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기를 겪으며 형성된 이 역사 해석은 서유럽 국가들이 마치 세계의 중심 지역으로서 역사를 주도해 온 것으로 그린다. 그것은 기껏해야 ‘절반의 유럽에 대한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편협함을 극복하자는 문제의식은 분명 우리에게도 소중한 참조 사항일 터이다. 승자뿐 아니라 약자와 패자, 국가 없이 지내야 했던 민족들, 사회 내 소수자까지 골고루 눈여겨보고, 이들에게 역사의 무대에서 적합한 자리를 찾아주자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예컨대 아일랜드의 역사와 폴란드의 역사가 공통점이 매우 많다는 식의 뜻밖의 통찰을 얻게 된다.

 

페스트를 겪으며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한다. 서유럽 중심 사관에서 이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의 변화에 주목한다. 반면 이 책은 영국의 장미전쟁과 프랑스 지역 부르고뉴 공국의 등장 이상으로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동부와 중부 유럽 4개 왕조의 변화를 상세히 서술한다.

동·서유럽 각 지역의 역사를 골고루 살펴본다는 게 그냥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저자처럼 각 지역의 역사에 대한 전문 지식을 구비하고 있고, 유럽의 웬만한 주요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다니면서 확인하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이 책에는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실로 감탄할 만한 콘텐츠가 가득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2000쪽이 넘는 4권의 책에 담긴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과 정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때로 저자의 관심사에 들어맞는 토픽은 더더욱 정성스러운 취급을 받아서, 예컨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악보와 함께 10쪽에 걸쳐 자세한 설명이 제시된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하면 별도의 에세이 형식으로 제시된 ‘캡슐’이다. 본 텍스트에서 다루지 못한 중요한 토픽들, 최근 학계 내의 논쟁, 때로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들이 소개된다. 300개에 달하는 이 캡슐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지적 감흥을 느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견해가 매우 강하게 녹아 있는 개설서다. 그 때문에 출판 당시 일부 역사가에게서 지극히 적대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4권에 나오는 캡슐 ‘101예비경찰대’ 항목에서 나치 독일의 예비 경찰대가 유대인 8만3000명을 살해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폴란드 공산당 보안국에서 활동한 유대인들이 어쩌면 더 악랄하게 고문과 살상을 한 사실을 폭로한다. 어느 집단은 가해자, 어느 집단은 선한 희생자 혹은 방관자 하는 식으로 순진하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찬반의 논란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이 거둔 성취가 실로 대단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아마도 이 책은 이미 유럽사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어서 더 자세한 전체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주경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