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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소련 核군축 이끈 ‘냉전시대 외교수장’

최만섭 2021. 2. 9. 05:08

미국·소련 核군축 이끈 ‘냉전시대 외교수장’

슐츠 美 前국무장관 100세로 별세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입력 2021.02.09 03:00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1982~1989년) 동안 국무장관을 지내며 냉전 종식에 공헌한 조지 슐츠가 6일(현지 시각) 만 10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특별 연구원으로 있던 후버연구소는 7일 구체적 사인은 밝히지 않은 채 “세 미국 대통령을 보좌하고, 매우 중요한 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슐츠가 숨졌다”고 전했다. 노동·재무·국무장관을 지낸 그의 기록은 미 행정부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다. 작년 12월 13일 100세 생일을 맞은 그는 232년 미 국무부 역사의 유일한 ‘100세 장관'이기도 했다.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해병으로 징집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산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5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에서 경제 전문가로 일했다. 이후 MIT와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지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인 1969년 노동장관에 발탁됐고 이듬해 백악관 예산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1972~1974년엔 재무장관을 지내며 소련과의 무역 협상을 주도했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다시 발탁된 그는 ‘냉전 해빙기'의 역사 일부를 썼다.

1986년 10월 12일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핵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한 ‘핵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이 ‘전략방위구상’(SDI)의 실전 배치를 포기해야만 소련 전략 핵무기를 폐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DI는 1983년 3월 레이건이 TV 생중계로 직접 발표한 것으로, 소련 핵미사일을 우주에서 요격하는 체계를 말한다. 미 언론이 ‘스타 워즈(Star Wars)’란 별명을 붙여가며 주목했던 핵심 정책이었다. 이걸 폐기하라는 주장 때문에 회담은 결렬로 기울고 있었다.

조지 슐츠(앞줄 오른쪽에서 둘째) 전 미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앞줄 왼쪽에서 둘째) 전 소련 외무장관이 1985년 11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소 정상회담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슐츠 뒤) 당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셰바르드나제 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뒤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하지만 슐츠는 어떻게든 ‘핵 군축 합의' 희망을 살리고 싶었다. 쉬는 시간 슐츠의 설득을 받은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폭탄, 순항미사일, 잠수함 무기 등 모든 핵폭발 장치를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그 무기 목록을 다 만들어서 얘기해 볼 수는 있죠”라고 답했다.

 

고르바초프의 말에 서둘러 답한 것은 레이건이 아닌 슐츠였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워싱턴포스트는 슐츠의 그 말이 “냉전 중 핵무기를 지구상에서 폐기하려는 가장 대담한 시도를 태동시켰다”고 평가했다. 1986년 ‘레이캬비크 회담'은 SDI 문제로 합의문 없이 끝났다. 하지만 미·소는 협상을 계속해 1987년 9월 사거리 500~5500㎞ 중거리 미사일의 실험·보유·배치를 금지하는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에 합의했다. 이 조약에 따라 미·소는 핵미사일 총 2692기를 폐기, 핵전쟁 발발 위험성을 크게 줄였다. 슐츠가 국무장관으로서 이뤄낸 성과였다.

1998년 6월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차 방미(訪美)해 스탠퍼드대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지켜보고 있다. /김주호 기자

국무장관 시절 그는 해외로 부임할 미국 대사들을 사무실로 초청한 뒤 구석에 있는 커다란 지구본 앞에서 “당신 나라를 가리켜 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사들이 자신이 부임할 국가를 가리키면 슐츠는 그들의 손가락을 미국으로 옮겨놓으며 “이곳이 당신 나라”라고 했다. 언제나 조국을 잊지 말고 미국을 위해 일하라는 뜻이었다. 국무장관으로 몇 차례 한국에 왔던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기여한 공로로 1992년 ‘서울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7일 “20세기 미국 외교의 궤적과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 슐츠만큼 기여한 사람은 별로 없다”며 “대통령으로서 나는 수많은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지혜를 구하지 못하게 돼 애석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따로 성명을 내 “슐츠 이후 국무장관이 된 사람은 누구나 그의 업적, 분별력, 지적 능력을 연구했다”며 “그는 국무부 역사에서 걸출한 인물이었고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그의 유산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김진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