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문화一流] “재능은 네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가르침… 아들은 ‘전설’이 되었다
고향 카탈루냐 발음 ‘파우’로 불리기 원했던 첼리스트 카살스
“넌 부자지만,난 가난한 남자 아내” 어머니도 평생 검소한 삶
입력 2021.02.08 03:00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세상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우 카살스(Pau Casals·1876~1973)는 카탈루냐 출신이라, 자신의 이름 ‘파블로’를 카탈루냐어인 파우(Pau)라고 불러달라고 하였다. 고향에서 가까운 지중해의 해변 마을 산살바도르에는 백사장에 맞닿은 하얀 집이 눈에 띈다. 바다를 사랑한 카살스는 이 집을 직접 짓고 아침마다 해변을 걸으며 영감을 얻었다. 여름이면 많은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매일 밤 콘서트를 열었고 낮에는 학생들에게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어린 카살스는 무명 음악가인 아버지에게 처음 음악을 배웠다. 반면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명문가의 딸인 어머니는 가난한 음악가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자, 가지고 있던 좋은 옷들을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평생 값싸고 수수한 옷만 입었다. 나중에 성공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좋은 옷을 입으라고 하자, 어머니는 “너는 부자지만, 나는 가난한 남자의 아내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재능을 타고났다고 우쭐대지 마라. 그것은 네가 해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재능으로 무엇을 하느냐다.”
첼로를 연주하는 스페인 첼리스트 파우 카살스.(왼쪽 큰 사진)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의 압제를 피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소도시 프라드에 정착한 그는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초청 백악관 연주회(오른쪽 맨 위)는 물론, 평생 연주회 때마다 카탈루냐 민요 ‘새의 노래’를 마지막 곡으로 연주했다. 그가 10년간 묵었던 프라드의 ‘르 그랑 오텔 드 몰리티’(오른쪽 가운데), 지금은 카살스 박물관이 된 카탈루냐 산살바도르의 집(오른쪽 맨 아래). /카살스재단·케네디라이브러리·호텔 홈페이지
카살스는 일찍이 첼로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부모의 능력으로는 뒷받침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음악 후원자로 유명한 대귀족인 데 모르피 백작이 카살스를 마드리드로 불렀다. 백작은 카살스를 자신의 저택에서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매일 오전마다 3시간씩 백작이 직접 문학⋅철학⋅역사⋅수학⋅미술⋅외국어 등을 가르쳤다. 백작은 “세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만 완벽한 예술가가 나온다”라고 말했다. 오후에는 카살스 혼자서 마드리드 음악원에 다니면서 음악을 공부했다. 이런 생활이 3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카살스를 가르쳤던 커리큘럼은 스페인 왕 알폰소 12세의 커리큘럼이었다. 젊어서 왕의 가정교사였던 백작이 그에게 왕과 같은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나중에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으니, 알폰소와 파블로다.”
그렇게 카살스는 음악가를 뛰어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나는 음악에만 빠져들 수 없다. 음악이란 다른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카살스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음악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음에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1928년에 ‘연주회 노동자 협회’를 세워서, 월수입이 100달러가 되지 않는 사람들만 회원으로 받아 콘서트를 열었다. 두 달마다 열리는 콘서트는 매번 만석이었다. 또 그는 ‘파우 카살스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자비로 단원들의 봉급을 다른 악단의 두 배를 주어 연주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대신 자신은 개런티를 받지 않았다. 카살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에 대한 세상의 존경은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1938년에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자, 카살스는 파시스트의 압제 때문에 스페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프랑코를 피해서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었는데, 피란민이 50만명에 달하였다. 그들을 향해 프랑코의 공군은 기총 소사를 하였다. 그렇게 죽음을 뚫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 속에 카살스도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피레네 산맥 속에 있는 프랑스령의 작은 도시 프라드(Prades)였다. 인구 5000명에 불과한 프라드 거리에 10만 난민이 노숙을 하였다.
카살스는 프랑코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은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에 그는 프라드에서 ‘바흐 페스티벌’을 열었다. 산살바도르의 집으로 오던 친구들이 산속으로 찾아왔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모여 작은 교회에서 음악의 향연을 펼쳤다. 소식이 전해지자, 카살스의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걸어서 프라드로 왔다. 그중에는 교수도 주교도 기업가도 노동자도 학생도 양치기도 그리고 양도 있었다. 페스티벌은 매년 계속되었다.
카살스는 아내와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17년을 프라드에서 살았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동시에 프랑코 독재에 대한 준엄한 항거를 보여준 행동이었다. 프라드에서 카살스는 고향땅을 그리워하면서 매일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를 첼로로 연주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그를 초대하여 백악관 음악회를 열었을 때도 카살스는 마지막 곡으로 ‘새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카살스는 세계 어디에서나 리사이틀의 마지막에는 ‘새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결국 카살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푸에르토리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카살스가 죽은 후에도 아내와 친구들에 의해서 프라드의 바흐 축제는 계속되었다. 카살스가 프라드에서 10년을 묵었던 그랑 호텔 테르말의 주인은 호텔에 카리용(여러 개의 종을 매달아 연주하는 탑)을 세웠다. 카리용에서는 매일 ‘새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한편 산살바도르의 빌라 카살스는 지금 카살스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대신에 그 집 뒤로 아우디토리 파우 카살스라는 연주장이 건립되어, 이제는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의 콘서트가 여기서 벌어진다. 무대의 뒤편은 새파란 유리로 장식되어 있어서, 음악이 울리면 마치 바닷속에서 음악을 듣는 것 같다. 카살스가 정말 좋아했을 것 같다. 마당 한쪽에는 첼로를 잡고 있는 카살스의 석상이 놓여 있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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