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줌마] 해가 뜨려면 저녁놀이 져야 하듯
[아무튼, 주말]
입력 2021.01.02 03:00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저녁노을이 종소리로 울릴 때, 나는 비로소 땀이 노동이 되고, 눈물이 사랑이 되는 비밀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詩)는 이어령의 것입니다. ‘종이 다시 울려면 바다의 침묵이 있어야 하고, 내일 해가 다시 뜨려면 날마다 저녁노을이 져야 하듯이, 내가 웃으려면 오늘 울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라는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한 시대를 비평하고 그 다음 시대를 예견해온 지성인 이어령이 이렇듯 감성적인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해 지는 전남 순천시 와온해변은 인기척 하나 없다. /김영근기자
이어령 선생에게 놀란 적이 또 있습니다. 5년 전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자기더러 지성이니 석학이니 하지만 수학과 셈은 젬병이라고 털어놓더군요. 특히 외국 출장을 가면 양복 주머니에 매일같이 동전이 수북이 쌓였다고 합니다. 셈이 서툴고 귀찮으니 물건을 살 때 무조건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왔기 때문이죠. 한번은 동전 꾸러미가 무거워 호텔 방에 던져놓고 잠시 나갔다 왔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답니다. 청소부가 팁인 줄 알고 몽땅 가져간 겁니다.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면 수학에 매진하겠노라 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가장 큰 ‘반전’은 아내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입니다. 함경도 태생으로 이어령과 서울대 국문과 동기인 그녀는, 충청도 양반집에 시집왔다가 남한엔 ‘소박맞다’는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내 발로 나가면 나갔지 왜 쫓겨나요?” 천하의 이어령도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아마 강 관장이었을 겁니다. “저 양반은 발이 땅에서 동동 떠 있어. 전구도 하나 갈 줄 모른다니까요” 하며 껄껄 웃던 이 여인이 한 살 연하의 남편을 한국 지성의 큰 산맥으로 우뚝 서게 한 진짜 주역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사진작가 김아타가 이어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갔다고 합니다. 이 선생은 “그게 나의 영정사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9년 전 맏딸 민아씨를 떠나보낸 상처가 아물기도 전, 생의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일의 해가 뜨려면 저녁놀이 붉게 져야 해. 슬퍼할 게 뭐 있어?” 여전히 호기로운 남편을 무연히 바라보던 강 관장의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주말 섹션을 맡았다고 하니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님이 경상도 말로 ‘아무튼’이 ‘우얬든동’이라고 문자를 보내오셨네요. 우얬든동,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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