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ㄱ의 순간] 아빠 따라 중얼중얼… 딸 아이 불경 소리, 한글 작품이 되다

최만섭 2020. 11. 19. 05:41

[ㄱ의 순간] 아빠 따라 중얼중얼… 딸 아이 불경 소리, 한글 작품이 되다

[조선일보 100년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조선일보 100년 한글특별전참여 작가 인터뷰] ⑥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

정상혁 기자

입력 2020.11.18 03:00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의미를 알 수 없는 발화가 자막으로 흘러간다. 화면 가운데 웬 깜찍한 꼬마가 옹알이처럼 뭔가를 계속 발음하고 있다. 그 소리에 맞춰 노래방 화면 자막처럼 알록달록한 한글이 한 글자씩 호응한다.

꼬마는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58)씨의 실제 딸이고, 이 6분짜리 영상은 서씨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작 ‘신묘장구대다라니’다. “큰 딸아이가 막 말문 트일 당시 핸드폰을 갖고 놀다가 제가 독경하는 불경을 기억하곤 혼자 중얼거리며 촬영한 셀피(selfie) 영상입니다. 나중에 이 영상을 발견하고 해당 불경의 한글 자막을 추가한 것이죠. 독경과 비슷한 음조와 표정이 귀여워 절로 미소 지어지는 작품입니다.” 런던에 머물고 있는 서씨가 이메일로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불경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마음의 독(毒)을 가라앉히고 깨달음을 기원하는 주문으로, 산스크리트어(語)를 원어 그대로 외는 게 특징이다. “마음고생하거나 망상이 끼어들 때 불경을 읽곤 했는데, 처음엔 의미를 전혀 추출해 낼 수 없는 문장 앞에서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았습니다. 언어가 스스로 의미 전달의 기능에 이렇게 강하게 저항하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저 의미와 문자의 형태를 배제하고 소리에 집중해 한참 독송하다 보니 자연스레 암송을 할 수 있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갓난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신작 ‘신묘장구대다라니’의 한 장면. 서도호 작가의 어린 딸이 내키는 대로 불경을 외는 영상 밑에 한글 자막을 넣어, 소리와 문자의 관계를 되묻는 작품이다. /서도호 스튜디오

해외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서양 주택과 한옥이 충돌하는 ‘집’ 연작 등 이주와 문화 충돌을 다루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는 언어 역시 하나의 집이다. “한글(언어)은 고국을 떠난 순간부터 ‘집’과 함께 깊이 생각하게 된 개념입니다. 모국에서는 실체 없이 투명한 존재였던 언어가, 생소한 외국어로 접하는 순간 갑자기 불투명한 물질로 다가옵니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오히려 언어의 형태와 소리에 더 예민해집니다. 언어의 물성이 전면에 나오는 것이죠.” 그는 알 수 없는 외국어(불경)를 빌려와 언어의 물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막으로 한글의 탁월한 표음(表音) 기능까지 드러낸다. 서씨는 “어떤 소리도 문자화할 수 있는 한글의 특성과 체계에 대해 다시금 깨달았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요소는 ‘글꼴’. 이번 영상 자막에 ‘샘이깊은물체’와 ‘산돌서울체’를 사용했는데, 이는 작가의 한글 글꼴에 대한 오랜 애정에 기인한다. “잡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등을 창간한 한창기 선생이 부모님과 깊이 교류하신 덕에 고교 시절부터 귀동냥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서씨의 부친은 한국화 거장 서세옥 화가다. 이후 네모틀에 한글을 구겨 넣는 ‘네모꼴’에서 벗어난 ‘탈(脫)네모꼴’에 관심이 커졌다. “1980년대 말부터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정원영 등 지인들의 음반 디자인을 하면서 ‘빨랫줄 글꼴’을 디자인해 로고로 쓰고 본문은 ‘공한체’로 작업했다”고 했다. “글꼴에 따라 작품의 경험도 달라지는 것 같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두 종류의 글씨체를 활용했다.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키우며 겪은 경험이 녹아든 ‘부성’에 관한 작품이라 개인적인 의미가 크다”고 했다. “딸아이의 중얼거림과 불경 자막은 대부분 일치하지 않지만 우연히 소리와 문자가 일치하는 순간,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소리가 언어가 되는 지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ㄱ의 순간이다.

#ㄱ의 순간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