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코로나의 축소판이었던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최만섭 2020. 8. 4. 05:39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코로나의 축소판이었던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20.08.04 03:14

2차 대전 중 티푸스 창궐로 공동체 붕괴 위기에 처해
노벨상 후보 등 의사들 방역 이끌고 지하 醫大도 운영
거리 두기, 감염자 자가 격리로 감염자 절반 이상 줄여

 

/일러스트=이철원

 

"아마 당신이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예요…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세계 곳곳에서 집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일용품의 부족보다 당연하게 여겼던 사소한 일상이 사라진 데 더 큰 상실감을 느낀다.

80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좁은 은신처에 숨어 살았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는 한, 내가 그 햇빛과 하늘을 볼 수 있는 한, 나는 결코 슬퍼질 수가 없어"라고 쓰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코로나에 지친 사람들에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안네의 맑은 영혼이 담긴 일기장이 봉쇄와 격리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했을 뿐 아니라, 끔찍한 전염병을 스스로 이겨낸 유대인들의 과학적 지혜가 코로나의 공포에 질린 인류에게도 희망을 주고 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와 호주 왕립 멜버른공대 수리생물학 교수인 루이 스톤 박사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진은 지난달 24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나치 치하 게토에 살던 유대인들은 오늘날 코로나와 싸우는 데 쓰이는 방역 대책을 앞서 도입해 심각한 전염병을 막아냈다"고 발표했다.

게토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치는 1940년 11월 45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3.4㎢에 불과한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로 몰아넣었다. 그와 비슷한 인구가 사는 의정부시의 면적은 약 82㎢이다.

엄청난 인구밀도에 하수 시설과 의료 시설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들불처럼 퍼질 수밖에 없었다. 나치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다. 예상대로 바로 발진티푸스가 창궐해 게토 안 유대인 10만여 명이 감염되고 2만5000여 명이 죽었다. 발진티푸스는 리케차균이 벼룩이나 이를 통해 감염되면서 발생하는 열병으로, 치사율이 40%에 이른다. 장티푸스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관계가 없다.


티푸스는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진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1941년 10월 이후 티푸스 환자 수가 뚝 떨어졌다. 당시는 이 같은 급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하지 못해 기적으로만 여겼다. 스톤 교수 연구진은 당시 인구와 식량 배급 상황 등을 감안해 질병 전파에 대한 수학 모델을 적용하면 티푸스가 사라지기 전 감염자가 기록에 나온 수치보다 2~3배는 됐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과학을 통해 생존의 길을 열었다. 연구진은 생존자들의 기록을 통해 게토에 있던 의사들이 방역 대책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 중에는 혈액형을 공동 발견해 노벨상 후보에도 오른 루드비크 히르슈펠트 박사도 있었다.

의사들은 게토에서 수백 회의 강연을 열어 대중에게 개인위생과 사회적 거리 두기, 그리고 병에 걸렸을 때 자가 격리의 중요성을 교육했다. 게토는 지하 대학까지 설립해 방역을 도울 의대생을 가르쳤다.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무료 급식소도 운영했다. 유대인들은 의료진을 존경하고 조언대로 따랐다.

연구진은 게토에서 이뤄진 방역 대책이 10만 명 이상의 티푸스 감염자를 막고 수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추정했다. 나치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폴란드 역사학자인 이스라엘 구트만은 "1942년 7월까지 게토 거주민 10만여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는데, 의료진과 방역 대책의 도움으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유대인은 혹독한 전염병을 이겨냈지만 안타깝게도 나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으로 옮겨져 대부분 학살됐다. 나치는 티푸스를 막는다는 이유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2년간 숨어 살던 안네의 가족도 1944년 8월 4일 독일 경찰에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안네는 이듬해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 로 15년의 인생을 마쳤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적었다. 우리는 종이에 남은 과거의 기록에서 교훈을 얻는다. 스톤 교수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일은 오늘날 코로나 대유행의 축소판이자 평행우주와도 같다"며 "코로나와 같은 대유행병을 이기려면 정부의 규제에 의존하기보다 공동체가 참여하는 방역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3/20200803036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