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람' 그는 왜 남의 고통을 못 느꼈을까
조선일보
입력 2020.07.25 05:00
많은 사람이 '나는 선하다' 믿지만 종종 눈앞서 벌어지는 악행 방관…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환상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돌리 추그 지음|홍선영 옮김|든|448쪽|1만8500원
"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라고요!"
100명 넘게 참여하는 미국 상류층 사교 콘퍼런스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성추행 금지 행동 규범을 제안하자 모임을 조직한 피츠와 자크는 발끈했다. 그렇지만 피츠의 아내는 말했다 "어떤 콘퍼런스에서든 나 아니면 주변의 누군가가 성추행을 당하지 않은 적이 없어." 충격받은 이들은 강력한 성추행 금지 규범을 공표한다.
뉴욕대학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저자는 "백인 남성이라는 '일상적 특권'에 젖은 피츠와 자크가 자신과 주변 사람은 모두 '선하다'는 편견에 매몰될 뻔했다가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선한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저자의 2018년 TED 강연은 첫 달에만 150만번 넘게 조회됐고, 그해 가장 인기 있는 강연 25에 들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선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기 행동의 중심에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사실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도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반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언제나 선한 사람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기보다는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선한 듯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믿는 사람(believer)'에서 '만드는 사람(builder)'으로 거듭나기"라 부른다.
'선한 사람'은 수치심을 잘 느낀다. 수치심은 교묘한 감정이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강력한 자기 위협과 맞닥뜨리면 누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닫은 채 회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수치심을 느낄 때 하는 행동은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죄책감은 동기를 부여한다. 죄책감을 느끼면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대인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지난 23일 (현지 시각) 파리 시청 앞, 성폭행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 임명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부끄럽다" "정의 없는 평화는 없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 중이다. 저자는 "그저 믿고 말하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옮기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누구나 소망한다"고 썼다. /로이터 연합뉴스
흑인 인권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는 말했다. "지금 우리 세대는 악한 자들의 증오에 찬 말과 행동에 대해 가책을 느껴야 할 뿐 아니라 선한 자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에 대해 역시 가책을 느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선하다 믿는 사람들이 종종 눈앞의 악행을 방관한다. 피해자에게 연민은 가지지만 그를 위해 나서지는 않는다. 저자는 "연민과 공감은 다르다"고 말한다. 연민은 원을 그려놓고 자기는 바깥에 서서 그 안의 누군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 사람의 처지를 안타까워는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을 애써 느끼려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안타까워할 때 우리는 무심코 자신을 더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권력감은 쉽게 찾아온다.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사람'이 권력감을 느끼면 의도치 않은 인식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더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 남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초점을 맞춘다. 남의 고통과 괴로움에 동조하는 일은 줄고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인도계 미국 여성인 저자가 유색인종의 인권, 여성과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다. 쉽고 명료한데 언어는 갓 벼린 칼처럼 예리하다.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후 세상을 버린 어느 권력자가 '너무 맑아서' '자신에게 가혹해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맹점이 있다. 저자는 "'난 맹점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의 맹점"이라고 말한다.
미국 인권운동가 조셉 맥닐은 1960년 그린즈버러 울워스 백화점의 백인 전용 간이식당에서 벌인 연좌 농성에 대해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행동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자 답한다. "아니요. 우리는 옳은 일을 했어요. 다만 침묵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든 했으면 어땠을까, 우리에게 그들이 왜 필요한지 조금 더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가만히 있어도 문제 될 것은 없죠. 다만 그들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요." 원제 'The Person You Mean To Be.'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5/20200725000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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