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송혜희 현수막' 21년… "이걸 걸어야 잠을 잡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30 03:00 | 수정 2020.05.30 07:05
[아무튼, 주말] 딸 찾아 21년 애절한 父情
‘송혜희 아빠’는 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도 현수막을 건다.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 만난 송길용씨는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찾을 것”이라며 “도움을 주신다면 심장을 팔아서라도 보답하겠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왜소한 노인이 흰색 1t 트럭 적재함에서 둘둘 만 현수막과 접는 사다리를 꺼낸다. 현수막을 왼손에 들고 사다리는 오른쪽 어깨에 걸친 채 횡단보도를 건넌다. 보아둔 자리가 있는 모양이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청량리역 사거리. 노인은 가로등에 사다리를 기대곤 거침없이 올라간다. 현수막과 연결된 끈을 기둥에 단단히 묶는다. 사다리를 붙잡아주는 사람이 없어 아슬아슬하지만 능숙한 솜씨다.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는 5m쯤 떨어진 다른 가로등으로 올라가 반대편 끈을 마저 동여맨다. 내려와서 보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사다리를 오른다. 건너편에서도 잘 보이도록 더 높이 묶는다. 바람 한 줄기 없는 허공에서 현수막은 팽팽하다. 고딕체로 굵게 쓴 외침이 눈에 들어온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송혜희. 21년 전 잃어버린 딸 이름이다. 아버지 송길용(67)씨는 여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서울 광화문과 을지로, 경부고속도로에도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가 걸려 있다. 현수막이 대체로 깨끗한 까닭은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고쳐 달기 때문이다. 트럭 조수석에는 실종 무렵 딸 사진과 현재 모습(추정)을 나란히 실은 전단 뭉치도 있었다.
'전국 미아·실종가족 찾기 시민의모임(전미찾모)' 사무실에서 송씨와 마주 앉았다. 풍파는 흔적을 남긴다. 수염을 깎지 않아 꺼칠한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나주봉 전미찾모 회장이 이날 인터뷰를 도왔다. 딸 찾아 21년. 아버지는 현수막에 담지 못한 애절한 사연을 토해냈다.
1999년 2월 13일에 멈춘 시간
경기도 평택 송탄여고 2학년이었어요. 학원 수업 마치고 친구 만난다던 혜희가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밤새 찾다가 이튿날 실종 신고를 했어요. 버스 운전기사는 "밤 10시 10분쯤 도일동 정류장에 혜희와 낯선 30대 남자가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에요. 그 남자 인상착의를 기억하진 못했고요. 경찰이 일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못 찾았어요.
당시 버스 정류장부터 집까지 2㎞는 논밭과 야산뿐인 한적한 농로였어요. 지금 같으면 가로등도 있고 CCTV도 있겠지만…. 혜희는 전교 1~2등을 다툴 만큼 공부 잘하는 둘째 딸이었습니다. 먹고살기 바빠 이쁘니 고우니 말도 못 하고 키웠어요. 용돈 필요할 때마다 애교 부리던 모습이 자주 떠올라요.
집에 가면 벽이 온통 혜희 사진이에요. 잠자리에 누울 때도 일어날 때도 그것부터 보입니다. 우리 부부는 딸을 잃고 생업을 포기했어요. 3년 동안 화물차 끌고 전국을 다 돌아다녔어요. 맨 정신으론 힘들어 술 마시고 전단 돌리고 라면 먹고 또 전단 돌리고…. 그러다 모두 알코올중독자가 됐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땐 음주 운전도 했어요. 애 엄마가 심장병에 걸리고 나서야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애 엄마한테 우울증이 왔어요. 2006년 어느 날 나갔다 돌아와 보니 전단 끌어안고 세상을 버린 겁니다. 옆에 농약이 있었어요. 나도 따라 가려고 했는데 목숨이 질겨요. 큰딸은 "아빠마저 죽으면 난 어떡해요" 했습니다.
그때부턴 죽는 거 포기하고 혜희를 찾는 데 전념했어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요.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어요. 살아서 혜희를 보지 못하면 죽어도 저승에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귀신이 돼서라도 찾을 거요.
"이거라도 해야 잘 수 있어"
생계요? 10년 전쯤 어느 정치인이 내 사정을 듣고 도와줬습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어요. 월 50만원을 받아요. 주민센터에서 쌀과 반찬도 보내줍니다. 현수막과 전단 제작비를 대주시는 분도 가끔 있고요. 8년 전 현수막을 걸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졌어요. 허리를 다쳤고 다리도 저렸지만 물리치료만 받고 1년을 견뎠어요. 어느 날 전단 돌리려고 트럭에서 내리다 주저앉았습니다. 허리가 완전히 망가진 거요. 평택시에서 무료 수술을 해줬습니다.
2014년에 다시 허리가 고장났어요. 또 누군가 수술비를 대줬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허리를 구부리지 못해요. 신발 신기도 어렵고 운전도 길게 못 해요. 월세와 전기료, 기름값이 드니까 현수막과 전단 제작비가 늘 부족합니다. 나한테 10만원은 현수막 4장 또는 전단 한 뭉치(4000장)와 같아요. 예전처럼 공사장에서 막일을 할 수도 없어 지금은 폐지를 주워 팝니다.
세월호 사건 때 너무 가슴이 아파 진도 팽목항에 다녀왔어요. 평택에 세월호 분향소도 있었는데 과일이 썩고 있길래 내가 몇 번을 갈아줬어요. 사고를 당한 학생들이 전부 내 딸 같았습니다. 평택에 '혜희 아빠'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소리를 하면 욕먹겠지만 세월호 유족은 나보다 나은 것 같아요. 나는 아직 딸을 못 찾았습니다. 찾는 날까진 이게 안 끝나요.
현수막을 걸고 전단을 돌려야 마음이 편해요. 그래야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코로나 사태로 전단을 못 돌렸어요. 서로 악수도 안 하는데 누가 전단을 받아주겠습니까. 주말마다 이렇게 서울에 와요. 평일에는 복잡해서 트럭을 대고 현수막을 걸 수가 없으니까.
지금 전국에 걸린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이 300장입니다. 길목마다 '내 자식'이 붙어 있어요. 나는 이걸 안 하면 그냥 죽은 목숨이에요. 마음속으로 혜희 엄마한테도 말하곤 해요. 여보, 내가 혜희 반드시 찾아낼 거야. 당신도 좀 도와줘.
10만원이면 전단이 한 뭉치
암매장부터 인신매매까지 21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기지촌, 사창가, 섬….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겠지요. 외국으로 팔려 갔을지도 몰라요. 내 형제도 친구도 "집착을 그만 버리라"며 질병이라고까지 말해요. 집착이든 집념이든 상관없어요. 애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해마다 5월이면 언론사에서 연락이 많이 와요. 가정의 달이고 5월 25일은 세계 실종 아동의 날입니다. 전국을 다녀도 혜희만큼 현수막이 많이 걸린 아이가 없어요. 그렇다고 다른 실종 아이 부모들이 안 찾는 건 아녜요.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애타게 찾고 있을 겁니다.
지난 21년간 제일 고마운 게 뭔지 아세요? 전국 어딜 가도 현수막을 함부로 떼지 않아요. 1년이든 2년이든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지방선거, 총선, 대선이 있어도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를 피해서 현수막을 겁니다. 그걸 보면서 생각해요. 다들 자식 키우는구나. 딸 잃은 부모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주는구나.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았어요. 하도 이상해서 무속인들한테 물어봤는데 "그럼 됐다"고 해요. 꿈에 나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거요. 혜희는 아직 살아 있구나. 거리에서 30대 후반 여자분을 보면 '내 딸도 저렇게 컸겠구나' 생각해요.
소원은 죽기 전에 혜희를 한번 보는 거요. 내 삶의 목표입니다. "너 어디 갔었니?" "뭐 했니?" 묻지 않을 거요. 어디서 뭘 하고 살았든 관심 없어요. '잘 키웠느니 못 키웠느니' '좋은 대학 가느니 마느니'는 나한테 아무 문제가 안 돼요. 내 딸한테는 자랑스러운 아빠라고 생각해요.
현수막 걸고 전단 돌릴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 넋 놓고 집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이상해져서 나가야 해요.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전단을 버리더라도 보이지 않게 해주세요. 어떤 사람은 바로 구겨서 집어던지고 어떤 사람은 씹던 껌을 거기다 뱉어요. 현수막도 훼손하지 말아주세요. 나한테는 그게 마지막 희망입니다.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해야죠. 내가 아빠잖아요. 죽기 전에 찾을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에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9/20200529021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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