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한글은 '음악'… 詩가 나에게 오면 노래가 된다

최만섭 2020. 4. 22. 05:45

한글은 '음악'… 詩가 나에게 오면 노래가 된다

조선일보

입력 2020.04.22 03:00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28] 우리 詩로 노래 만드는 송창식
재일교포 위한 '가나다라'부터 서정주 詩 '푸르른 날'도 노래로
"시상은 감상이 아니라 지성… 미당의 말이 작곡의 지침됐죠"

"가나다라마바사/…/태정태세문단세/…/갑자을축병인정묘…."

가수 송창식이 1980년 발표한 노래 '가나다라'의 가사다. 그는 왜 이런 가사를 썼을까. "공연 때문에 일본을 갔는데 재일교포 3세들이 발음 때문에 한글을 어려워한다는 거예요. 한글 공부에 도움 주려고 어려운 발음을 골라 만든 노래인데, 정작 교포들에겐 큰 인기를 못 얻고 한국에서 히트했지요."


지난달 27일 경기 하남시 미사리 라이브카페 '쏭아'에서 기타를 치며 '담배 가게 아가씨'를 부르고 있는 가수 송창식.
지난달 27일 경기 하남시 미사리 라이브카페 '쏭아'에서 기타를 치며 '담배 가게 아가씨'를 부르고 있는 가수 송창식. 그는 이 노랫말을 매부가 들려준 명동 와이셔츠 아가씨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경기 하남시 라이브카페에서 만난 송창식은 "한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한국 대표 시인 서정주와 김남조의 시로 곡을 만든 가수이기도 하다. 서정주가 유일하게 자신의 시로 노래 만드는 걸 허락한 사람이 송창식이다.

"미당(서정주) 선생 제자 중 문정희란 시인이 있어요. 어느 날 방송을 같이 하고 제가 '차나 한잔합시다' 하니, 자기는 미당 선생과 약속이 있어 가야 한대요. 따라갔지요. 그렇게 셋이 시 이야기, 음악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선생이 그래요. '내 시 중에는 '푸르른 날'이 노래 부르기가 제일 적당하지?' 그래서 집에 와서 노래를 만들어 다음 날 들려 드렸어요.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서정주의 '귀촉도'도 송창식의 노래로 재탄생할 뻔했다. 미당의 제자들이 그에게 "귀촉도를 노래로 만들어 선생이 돌아가시면 불러 드리고 싶다"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는 "귀촉도가 가진 리듬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걸로 노래를 만들면 너무 인위적으로 돼 버린다"고 했다.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는 나병(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자선 콘서트를 위해 곡으로 만들었다. "김남조 시인이 콘서트에서 '그대 있음에' 노래를 듣고 이러시더라고요.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이나 감동을 할까요?'" 김 시인과는 지금도 긴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최근 읽은 책도 김남조의 '사람아, 사람아'다. "어느 날 선생이 제 노래 중 '별똥별'을 '흐름별'로 바꾸면 안 되냐 하시더라고. 본인이 '별똥별'이란 단어를 안 좋아한다며."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이 반대해 못했다고 한다. 단연 좋아하는 시인은 서정주다. "선생이 젊었을 때 쓴 번쩍번쩍하고 파릇파릇한 시 말고 노인이 돼 쓴 시들을 좋아해요. '질마재 신화' 같은. 시처럼 쓰지 않는 시. 객소리처럼 쓰는 시."

서정주는 그에게 곡 쓰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이기도 하다. "인천서 중학교 다닐 때 '문학의 밤' 행사에 선생이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시는 감흥이 일어났을 때 바로 쓰는 것이 아니다. 가슴속에 넣었다가 먼 훗날 시를 쓸 때 끄집어내는 거다. 시상은 감상이 아니라 지성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제 곡 쓸 때 지침이 됐어요."

송창식이 생각하는 한글은 '감정의 단어'다. 그는 "한글은 그 뜻을 소리가 아닌 감정으로 전달한다"며 "말의 흐름과 감정만 전달되면 문법이 안 맞아도 무슨 말인지 다 안다"고 했다. 이런 점 때문에 한글이 가장 음악적인 언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젊은 가수들이 가사에 한글과 영어를 문법에 맞지 않게 섞어 쓰는 것도 이런 한글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토론이 잘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토론은 뜻을 교환하는 자리인데 상대의 감정이 먼저 전달되기 때문." 문법의 자유가 세대 간 틈을 벌어지게 하는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최근 유행하는 줄임말이 그렇다. 그는 "말을 줄이는 건 좋은데 그걸 붙박이로 해 버리면 안 줄임말을 쓰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한다. 세대 간 대화가 단절되는 거다. 언어의 단절이 감정의 단절이 되고, 지성의 단절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송창식이 뽑은 노랫말]

재일교포 한글 교육을 위해 만든 곡 '가나다라'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갑자을축병인정묘/삼천갑자 동방삭이"

서정주의 시로 만든 곡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김남조의 시로 만든 곡 '그대 있음에
'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그대 있음에"

송창식표 사랑 노래 '왜 불러'

"왜 불러 왜 불러/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왜 불러/토라질 때 무정하더니 왜 왜 왜/자꾸자꾸 마음 설레게 해"

송창식이 직접 쓴 '담배 가게 아가씨'

"우리 동네 담배가게에는/아가씨가 예쁘다네/…/온 동네 청년들이/너도나도 기웃기웃기웃"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2/20200422001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