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19 04:00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어려움에 처해 봐야 진짜 친구를 가려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 반대의 이치도 알아두어야겠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벗어나 다시 웃게 되었을 때, 또 한 번 우정은 감별되는군요.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홍여사 드림
![](http://life.chosun.com/site/data/img_dir/2018/01/18/2018011801755_0.jpg)
나와는 상관없는 줄 알고 흘려듣던 단어가 어느 날 나의 현실이 되고, 내 인생을 점령해버리기도 하더군요. 저에게는 '난임'이 바로 그런 단어였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없었기에 저는 결혼만 하면 자연히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3년이 넘도록 결실이 없었고 고민 끝에 병원을 찾게 됐죠. 뚜렷한 원인은 없기에 불임은 아니고 '난임'이라더군요. 그 '원인 불명'이라는 말이 희망이면서 고문이라는 것을 저는 지난 10여년 동안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난임 부부라면 누구나 말하는 심신의 고통 이외에, 제가 유독 못 견뎌 했던 아픔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난임 때문에 생겨나는 인간관계의 작은 균열들이었습니다. 남들 눈에 초라해 보이는 것, 뭔가 빠져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러움을 감추고 애써 초연한 척할 수만도 없었죠. 그런 식으로는 누구와도 의미 있는 관계를 쌓아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애초에 결심했습니다. 부러우면 부럽다 말하자.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 부탁하자. 주위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귀여워하자. 가엾은 사람이 될지언정 못난 사람은 되지 말자.
그러고 보니 지난 10여년간, 제 주위의 동년배 여자들 대부분이 엄마가 되었네요. 결혼한 친구들은 물론이고 제 여동생과 손아래 동서도 아이 둘씩을 낳았습니다. 임신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용암과 얼음 폭포가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솟구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면 제 마음은 이내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지죠. 진심으로 축하하고, 부럽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아기를 마음껏 귀여워하며, 유난히 물고 빱니다.
오죽하면 여동생이 그러더군요. 제발 그렇게 속없이 다 내보이지 좀 말라고요. 자식 있다고 다 행복하냐고…. 하지만 제 눈엔 그렇게 보이던 걸요. 아이가 있으면 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애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동생의 말이 복에 겨운 빈말로 들렸습니다.
그럴 때 제 심정을 알아주는 건 차라리 동서였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난임 치료를 시작할 때 동서가 들어왔죠. 게다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임신, 딸과 아들을 연년생으로 순탄하게 얻었습니다. 저에게는 가시밭길만 같았던 일들이 곁의 누군가에게는 활주로처럼 뻗어 있다는 사실에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 부러움을 감추면 추하게 지는 거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고 한껏 부러워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동서한테도 짠하게 느껴졌던 걸까요? 동서는 그 누구보다도 저의 상황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제가 받는 시술에 관해서도 자상한 관심을 보였고, 임신에 유용한 정보들도 많이 수집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를 대상으로 점점 더 많은 얘기를 하게 되더군요.
언젠가부터는 동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요. 이젠 나이로 보나 심신의 상태로 보나 터널의 끝에 와 있는 느낌이라고요. 그럴 때면 동서는 말했습니다. 형님 같은 사람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요. 마음을 편히 갖고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또 새로운 에너지가 솟을 거라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좋은 소식이 품 안에 날아들어 와 있을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요.
그 말이 과연 신통했던 걸까요? 난임과의 전쟁 11년째에 드디어 저도 아기 천사를 만났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시술이 성공을 거둔 겁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동안 애써 초연함을 가장해온 친정 부모님은 통곡하시고 시부모님 역시 당장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십니다. 제 친구들은 벌써부터 아기 용품을 사보내고 남편의 동료들은 다투어 술을 사고 이웃들까지도 저를 만나면 얼싸안아 주더군요. 저는 몰랐습니다. 제 주위 사람들이 저를 위해 그렇게 웃고 울어줄 줄은요. 아이를 얻은 기쁨 못지않게 세상의 축하가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가장 격하게 축하해줄 줄 알았던 동서가 안 보입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했던가 말았던가,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했겠죠. 제가 전화로 기쁜 소식을 알렸을 때 동서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형님 축하한다고요. 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정말 그게 다였습니다. 표정에도 말투에도, 예전에 동서가 보여주던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축하와 샘솟는 행복감 속에서도 동서의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만큼 동서가 제게는 중요한 사람이고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저럴까? 물론 아이를 배 속에 품은 채로 이런저런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해를 못 하고는, 마음 편히 동서를 대할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더 이상의 나쁜 생각이 자라기 전에, 저는 동서에게 솔직하게 말을 했습니다. 동서 덕분에 나도 엄마가 됐어. 축하해줄 거지? 그 말에 동서는 입으로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형님은 욕심도 많으시네요. 저는 임신했을 때 맘껏 웃어보지도 못했어요.
욕심…. 그 두 글자가 제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전적 의미로는 동서의 말을 해석할 수 없으니까요. 욕심은 오히려 동서가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요? 51의 행복을 지금껏 누려온 사람이 뒤늦게 49를 차지한 사람에게 축하조차 해줄 수 없다면요. 오직 결핍 속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게 진짜 마음이고 정일까요?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봅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진짜 세상인심을 몰랐나 봅니다. 아기 천사는 내 품에 날아들었는데 제 가슴엔 큰 바람 구멍이 하나 뚫렸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어른이 되는 거라더니, 이런 식으로 세상은 저를 가르치려 드는 걸까요?
하지만 저는 아직 마음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든지, 일시적인 변덕 같은 것이 작용한 거라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 긴 세월, 저와 동서 사이에 오갔던 한숨과 웃음이 다 가짜였다고 믿을 수는 없기에, 그런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기에 말입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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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임 부부라면 누구나 말하는 심신의 고통 이외에, 제가 유독 못 견뎌 했던 아픔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난임 때문에 생겨나는 인간관계의 작은 균열들이었습니다. 남들 눈에 초라해 보이는 것, 뭔가 빠져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러움을 감추고 애써 초연한 척할 수만도 없었죠. 그런 식으로는 누구와도 의미 있는 관계를 쌓아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애초에 결심했습니다. 부러우면 부럽다 말하자.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 부탁하자. 주위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귀여워하자. 가엾은 사람이 될지언정 못난 사람은 되지 말자.
그러고 보니 지난 10여년간, 제 주위의 동년배 여자들 대부분이 엄마가 되었네요. 결혼한 친구들은 물론이고 제 여동생과 손아래 동서도 아이 둘씩을 낳았습니다. 임신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용암과 얼음 폭포가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솟구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면 제 마음은 이내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지죠. 진심으로 축하하고, 부럽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아기를 마음껏 귀여워하며, 유난히 물고 빱니다.
오죽하면 여동생이 그러더군요. 제발 그렇게 속없이 다 내보이지 좀 말라고요. 자식 있다고 다 행복하냐고…. 하지만 제 눈엔 그렇게 보이던 걸요. 아이가 있으면 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애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동생의 말이 복에 겨운 빈말로 들렸습니다.
그럴 때 제 심정을 알아주는 건 차라리 동서였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난임 치료를 시작할 때 동서가 들어왔죠. 게다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임신, 딸과 아들을 연년생으로 순탄하게 얻었습니다. 저에게는 가시밭길만 같았던 일들이 곁의 누군가에게는 활주로처럼 뻗어 있다는 사실에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 부러움을 감추면 추하게 지는 거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고 한껏 부러워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동서한테도 짠하게 느껴졌던 걸까요? 동서는 그 누구보다도 저의 상황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제가 받는 시술에 관해서도 자상한 관심을 보였고, 임신에 유용한 정보들도 많이 수집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를 대상으로 점점 더 많은 얘기를 하게 되더군요.
언젠가부터는 동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요. 이젠 나이로 보나 심신의 상태로 보나 터널의 끝에 와 있는 느낌이라고요. 그럴 때면 동서는 말했습니다. 형님 같은 사람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요. 마음을 편히 갖고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또 새로운 에너지가 솟을 거라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좋은 소식이 품 안에 날아들어 와 있을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요.
그 말이 과연 신통했던 걸까요? 난임과의 전쟁 11년째에 드디어 저도 아기 천사를 만났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시술이 성공을 거둔 겁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동안 애써 초연함을 가장해온 친정 부모님은 통곡하시고 시부모님 역시 당장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십니다. 제 친구들은 벌써부터 아기 용품을 사보내고 남편의 동료들은 다투어 술을 사고 이웃들까지도 저를 만나면 얼싸안아 주더군요. 저는 몰랐습니다. 제 주위 사람들이 저를 위해 그렇게 웃고 울어줄 줄은요. 아이를 얻은 기쁨 못지않게 세상의 축하가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가장 격하게 축하해줄 줄 알았던 동서가 안 보입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했던가 말았던가,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했겠죠. 제가 전화로 기쁜 소식을 알렸을 때 동서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형님 축하한다고요. 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정말 그게 다였습니다. 표정에도 말투에도, 예전에 동서가 보여주던 따뜻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빗발치는 축하와 샘솟는 행복감 속에서도 동서의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만큼 동서가 제게는 중요한 사람이고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저럴까? 물론 아이를 배 속에 품은 채로 이런저런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해를 못 하고는, 마음 편히 동서를 대할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더 이상의 나쁜 생각이 자라기 전에, 저는 동서에게 솔직하게 말을 했습니다. 동서 덕분에 나도 엄마가 됐어. 축하해줄 거지? 그 말에 동서는 입으로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형님은 욕심도 많으시네요. 저는 임신했을 때 맘껏 웃어보지도 못했어요.
욕심…. 그 두 글자가 제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전적 의미로는 동서의 말을 해석할 수 없으니까요. 욕심은 오히려 동서가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요? 51의 행복을 지금껏 누려온 사람이 뒤늦게 49를 차지한 사람에게 축하조차 해줄 수 없다면요. 오직 결핍 속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게 진짜 마음이고 정일까요?
제가 너무 순진했나 봅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진짜 세상인심을 몰랐나 봅니다. 아기 천사는 내 품에 날아들었는데 제 가슴엔 큰 바람 구멍이 하나 뚫렸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어른이 되는 거라더니, 이런 식으로 세상은 저를 가르치려 드는 걸까요?
하지만 저는 아직 마음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든지, 일시적인 변덕 같은 것이 작용한 거라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 긴 세월, 저와 동서 사이에 오갔던 한숨과 웃음이 다 가짜였다고 믿을 수는 없기에, 그런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기에 말입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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