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friday] 결혼자금 더 냈으니 시집 행사 빼달라는 아내

최만섭 2017. 9. 15. 09:49

[friday] 결혼자금 더 냈으니 시집 행사 빼달라는 아내

입력 : 2017.09.15 04:00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결혼은 종합 예술입니다. 최소 여섯 사람의 등장인물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하고, 사랑과 윤리와 체면과 돈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하지요. 그 모든 요소를 조화롭게 관리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갈등이 발생합니다. 나의 이기심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 내세우면 결혼은 급기야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화음을 마음속에 그리며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만큼은 있어야겠지요.

홍여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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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안병현

결혼한 지 3년째인 신혼부부(?)입니다. 아이는 아직 없고요.

아내와는 2년 가까이 사귀었는데 교제 기간이나 결혼 준비 과정에서 별다른 갈등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양가 부모님이 선뜻 허락해주셨기 때문이죠. 다만 남자로서 한 가지 부담스러운 것은 신혼집 장만이었습니다. 제 저축으로는 서울의 작은 아파트 전세금을 충당하기에도 버거웠거든요. 부모님께 그 부담을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보니 만만치 않더군요. 평범한 직장인이 서른 초반에 혼자 힘으로 집 장만을 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여자친구가 전세 자금 충당을 거들겠다는 겁니다. 고맙고 다행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집을 구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여자친구가 뜻밖의 말을 꺼내더군요. 집이 너무 작아서는 안 되겠다며 좀 더 큰 집을 보자는 겁니다. 부족한 자금은 자기가 그만큼 더 대겠다고요.

솔직히 저는 제 능력과 분수를 벗어난 출발은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20평대 집도 버거워 여자친구에게 손을 벌리는 판에 30평대로 늘려보자니…. 그러나 50평대 아파트 살다가 좁은 집에선 못 살겠다는 여자친구, 그런 좁아터진 집에 딸의 신접살림을 차리려니 속상하다는 장모님 앞에서 저는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집에 관한 모든 것은 아내가 결정하고 책임졌습니다. 번듯한 신혼집을 차리는 데 제 돈보다 아내의 돈이 더 들어갔죠. 재테크에 능력이 있으신 장모님이 알차게 불려주셨다는 아내의 저금은 애초에 저보다 많았던 겁니다. 어쨌거나 저로서는 감사할 일이지요. 남자 체면이 좀 구겨졌지만 요즘 세상에 그깟 체면이 대수입니까?

하지만 결혼해서 살아보니 내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펼쳐집니다. 결혼 이후 이제까지 아내는 바쁘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시집에 가기를 한사코 피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부모님을 찾아뵈려던 제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입니다. 생신에 간단히 외식할 때조차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는 때가 있고, 특히 제사에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 문제로 조금씩 갈등이 쌓여가던 중에 마침내 아내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네요. 결혼에 더 많은 돈을 들인 게 본인이기 때문에 시집의 제사나 명절, 행사 따위에 시달릴 이유가 없답니다. 그러니 자기는 빼달랍니다.

저는 그 선언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아내가 그저 시집에 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줄만 알았지 그런 셈법을 깔고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아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입니다.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이름을 대며, 그런 데에 가보면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될 거랍니다. 여자라고 항상 억눌려서 살라는 법이 없다네요.

저는 아내의 말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시집 행사에 시달리다니요? 시달려보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해야지요. 아직 제대로 한 번도 참석해보지 않아놓고 시달릴 이유가 없다니….

뿐만 아니라 아내의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자금을 많이 댄 여자나 안 댄 여자나 타인에게 부당하게 시달릴 이유는 똑같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돈 댄 사람은 맘대로 살아도 되고, 돈 못 댄 사람은 눈치 보며 살아야 하고. 그럼 정기적으로 시부모와 만나며 사는 많은 며느리는 무능력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건가요? 남 얘기할 것 없이, 저는 뭔가요? 싫으나 좋으나 처갓집에 가자면 나서는 저는 자력으로 번듯한 신혼집을 장만하지 못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건가요?

가족이 모이고 만나는데 어째서 돈이 척도가 되어야 하느냐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그 말에 아내는 더욱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시부모는 엄밀히 말해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랍니다. 그리고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성가신 권리 침해를 받지 않기 위해 여자도 능력을 키워야 하는 세상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성가신 인간들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나 능력만 있으면 아무와도 애초에 관계 맺지 않고 내 편한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틀린다. 그러자 아내는 그게 무슨 차이냐고 하네요. 그리고 저더러 말이 안 통한답니다.

저야말로 아내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어쩌면 아내는 시부모까지도 두 종류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돈을 대준 부모와 안 대준 부모. 돈도 안 보탠 시부모한테 효도하는 척 제스처를 보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닌지.

이럴 거면 차라리 아내의 돈을 넙죽 받지 않고 어디 월세방으로라도 들어가는 게 나았겠습니다. 물론 그런 집에 살러 와줄 사람도 아니지만요. 차라리 그때 파투가 나는 게 서로에게 나았을까요?

제가 정말 우려하는 부분은 부부간의 신뢰입니다. 이런 사람과의 결혼생활에 제가 무엇을 의지할 수 있죠? 만일 제가 돈을 잃고 몸까지 상한다면 제 곁에 남아 있어 줄까요? 당신은 더는 돈을 못 버니 나를 귀찮게 할 자격이 없다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