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10 03:04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주년] [2] 장 칼뱅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완성자… 제네바를 '그리스도학교'로 건설
교회 넘어 정치·사회복지 개혁, 귀천 없는 직업 소명의식도 강조
"富는 축복… 공익 위해 쓰여야" 금욕적인 삶, 무덤에 묘비도 없어
스위스 제네바 플랭팔래(Plainpalais) 공립묘지의 묘지 번호 707번. 이곳에 장 칼뱅(1509~1564)이 잠들어 있다. 칼뱅은 죽기 직전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므로 장례식에서 일절 허식을 행하지 말고 무덤에 어떤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일까,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무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JC'라는 칼뱅의 이니셜이 새겨진 돌과 1999년에 세운 간단한 알림판이 없다면 찾기도 쉽지 않다. 그의 묘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완성자라 불리는 개혁교회 전통의 확립자 칼뱅의 삶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프랑스 북부 작은 마을 누아용에서 태어난 칼뱅은 10대 때부터 파리에서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을 배웠고, 오를레앙대학과 부르주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을 수학했다. 칼뱅이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시기는 1533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1534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자 칼뱅은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에 머물면서 고국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고자 '기독교 강요(綱要)'를 집필하기 시작해 1536년 3월 출판했다. 그 후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을 만나면서 그에게는 운명의 도시인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되었다.
"사도(使徒)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 이 말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1513년경~1571년)가 제네바를 경험한 후 한 말이다. 칼뱅과 그 동료들에 의해 제네바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전체가 복음에 걸맞은 도시로 변모됐음을 극찬한 것이다. 한때 토착세력과의 갈등으로 추방됐다가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을 위해 온 마음과 힘을 쏟았다. '교회 법령'을 마련해 예배 의식과 교회 관습을 개혁하고,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기구인 컨시스토리(Consistory)를 만들어 도덕을 바로 세웠다. 신학적 논쟁들을 통해 올바른 사상을 수립하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구빈원(救貧院)과 프랑스기금(Bourse Francaise)을 통해 사회 복지를 실천하는 등 제네바를 이상적인 개신교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이를 통해 제네바는 칼뱅의 도시가 되었으며, 칼뱅은 제네바의 영혼이 되었다.
프랑스 북부 작은 마을 누아용에서 태어난 칼뱅은 10대 때부터 파리에서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을 배웠고, 오를레앙대학과 부르주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을 수학했다. 칼뱅이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시기는 1533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1534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자 칼뱅은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에 머물면서 고국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고자 '기독교 강요(綱要)'를 집필하기 시작해 1536년 3월 출판했다. 그 후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을 만나면서 그에게는 운명의 도시인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되었다.
"사도(使徒)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 이 말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1513년경~1571년)가 제네바를 경험한 후 한 말이다. 칼뱅과 그 동료들에 의해 제네바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전체가 복음에 걸맞은 도시로 변모됐음을 극찬한 것이다. 한때 토착세력과의 갈등으로 추방됐다가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을 위해 온 마음과 힘을 쏟았다. '교회 법령'을 마련해 예배 의식과 교회 관습을 개혁하고,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기구인 컨시스토리(Consistory)를 만들어 도덕을 바로 세웠다. 신학적 논쟁들을 통해 올바른 사상을 수립하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구빈원(救貧院)과 프랑스기금(Bourse Francaise)을 통해 사회 복지를 실천하는 등 제네바를 이상적인 개신교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이를 통해 제네바는 칼뱅의 도시가 되었으며, 칼뱅은 제네바의 영혼이 되었다.
칼뱅의 영향은 교회를 넘어 서구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특히 상업과 노동, 임금, 이자, 복지 등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칼뱅은 경제 영역에서의 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철저한 금욕주의를 강요한 중세 가톨릭과 달리 칼뱅은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이자(利子)와 상업,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직업의 귀천을 넘어선 소명(召命)도 강조했다. 이는 당시 스위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상업·산업 세력이 그의 지지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이 탐욕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다. 그의 경제관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이자도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허용하지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고리대금은 금지했다. 상업 활동 역시 매점매석, 폭리, 독점하는 경우는 '살인자'라 했다. 사유재산과 부(富)는 공공선과 공익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자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보낸 하나님의 대리자'라고도 했다. 일자리나 임금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는 것이라 했다. 때로는 '신정(神政) 정치'로까지 불린 제네바 목회를 통해 칼뱅은 철저히 복음 공동체 건설을 지향했던 것이다
. 무엇보다 칼뱅 자신의 삶은 철저히 금욕적이었다.
칼뱅의 정신은 1541년 제네바로 귀환하면서 개혁의 선배인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라는 구절에 함축돼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 표어처럼 칼뱅은 교회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부터 늘 개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칼뱅의 정신은 1541년 제네바로 귀환하면서 개혁의 선배인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라는 구절에 함축돼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 표어처럼 칼뱅은 교회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부터 늘 개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