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주용중 칼럼] 누가 '한국의 샌더스'인가

최만섭 2016. 3. 31. 11:12

[주용중 칼럼] 누가 '한국의 샌더스'인가

金·安 대표의 샌더스 마케팅, "발가락이 닮았다" 외치는 꼴
소득과 부의 불평등 외면하면 與黨도 대선서 심판받을 것
구호와 從北에 갇힌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守舊일뿐

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 사진
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
미국 대선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는 공화당 후보가 될 수는 있지만, 본선에서 대통령으로 뽑히기는 어렵다. 민주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가 되기엔 역부족이지만, 만일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힐러리 클린턴보다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더 크다. 트럼프와 샌더스 두 이방인이 150년 전통의 공화·민주 양당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는 게 올해 미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게 딴판인데 "기성 정치 체제는 끝났다"는 외침만은 합창이다. 이런 선동으로 양당 당원들 마음을 빼앗고 있으니 기성 후보들이 발을 동동 구를 만하다.

두 사람 중 누가 미국 정치에 더 큰 파장을 남길까. 최저임금 2배 인상, 공립대학 등록금 면제 등 샌더스의 포퓰리즘 공약들은 실현이 쉽지 않으나 샌더스식 정치는 주목할 만하다. 트럼프는 유권자들의 분노를 부추기지만 샌더스는 그 분노의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의 파격(破格)을 즐기고, 샌더스 지지자들은 그의 진정성에 환호한다. 정치가 트럼프에게 인생 2모작이나 취미 같은 것이라면, 샌더스에겐 평생의 소명이다. 대선에서 패배한다면 누릴 게 많은 트럼프는 정치를 접겠지만 샌더스는 올해의 도전을 바탕으로 정치의 폭을 더 넓혀 나갈 게 분명하다.

샌더스 바람은 바다 건너 한국에도 상륙했다. 야권에선 '버니 샌더스, 더민주 혁신을 말하다' '샌더스 돌풍과 한국 정치' 등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연구원은 지난달 "샌더스의 진실한 모습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고 돌봐줄 것 같은 모습'이 지지자들의 관심을 샀다"면서 "중도 성향 유권자나 무당파의 지지를 얻을 정책 대안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서로 '한국의 샌더스'인 듯이 경쟁하고 있다. 마치 '발가락이 닮았다'고 외치는 사람들 같다.

얄팍한 샌더스 마케팅으로 유권자들을 홀리려 하기 전에 샌더스 현상의 의미부터 곰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 올해 미국 대선의 최대 이슈는 샌더스가 제기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 문제다. 우리나라의 양극화도 미국 못지않게 심각하다. 이번 총선에서도 새누리당은 '일자리 성장론',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 성장론', 국민의당은 '공정 성장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논쟁이 불붙지는 않을 것이다. 총선은 253곳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 대선은 다르다. 양극화 문제가 최대 쟁점 중 하나로 떠오를 것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각양각색 방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이 중 어떤 해법을 선택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화자(話者)가 누구냐가 더 중요하다. 샌더스는 우리로 따지면 '영남'(공화당의 아성인 버몬트주)에서 36년간 무소속의 시장, 하원·상원 의원으로 일하면서 초지일관 진보적 소신을 지켜왔다. 그의 구호는 '필 더 번(Feel the Bern)'이다. '버니 (샌더스)를 느껴 보라'는 것이다. 우리 여야 정치인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둘째, 미국의 여야 대선 후보 중 젊은 층에서 인기가 제일 높은 사람이 샌더스다. 그의 나이 75세다. 2008년 47세의 버락 오바마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보다 젊은 층의 지지가 더 폭발적이다. 샌더스는 정치 분야에서도 생각과 열정에 대한 공감이 육체 나이에 대한 공감보다 크다는 걸 입증했다. 그런 점에서 세대 갈등 또는 세대 단절이 병폐인 우리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셋째, 젊은 시절 자유연합당에 몸담았던 샌더스는 무소속을 고수하다 작년 11월 민주당으로 옮겼다. 트럼프는 민주당→공화당→개혁당→민주당→공화당→무소속→공화당으로 옮겨 다닌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안방을 내줄 정도로 공화·민주 양당의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얘기다. 한국의 4·13 총선을 앞두고도 새누리당과 더민주의 간판이 서로 당적을 맞바꾸는 이변이 일어났다. 총선이 끝나면 이런 넘나듦이 더 빈번해지면서 정계 개편이 진행될 것이다. 친박과 친노의 정체성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새 흐름에 떠밀려 갈 것이다.

양당제가 우리보다 강고한 미국의 샌더스 현상을 보며 제일 반성해야 할 그룹은 진보 진영이다. 샌더스는 인구 4만여 명의 벌링턴 시장으로서 주민들의 삶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데 주력했고, 연방 상·하원 의원으로 일하면서는 공화·민주 의원들과 씨름하며 누구보다 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구호와 종북(從北)에 갇힌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守舊)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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