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으로 마음 진정할 수 있지만 근원적 해결책은 아냐, 상황에 대한 객관적 통찰 필요
한 가지 근심이 해결되면 다른 걱정 생기는 게 인간사… 포기해야 자유 얻을 수 있어
이러한 상황 탓에 겪는 정신적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명상을 찾게 되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배운 바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간단한 명상법을 소개해주었다. 그것은 '숨 보기'이다. 마음을 코밑에 집중하고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쉰다', 내쉴 때 '내쉰다'고 반복해서 염하면 된다. 숨 보기 연습이 잘되면, 마음이 코밑으로 모이게 되어, 머리 아플 일도 가슴 아플 일도 배 아플 일도 없어진다. 마음은 집중하는 곳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상황을 종합해볼 때 가장 좋은 처방은 '귀국'이었지만, 본인은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한 듯했다. 어떻게 해서든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잡다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니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명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더 효과적으로 업무에 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 통찰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언을 해주니 자신은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명답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이 생겼다. 세계적 유명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돼 아버지가 너무나 기뻐하고 지금까지도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드릴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근심이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기는 게 인간사다. 그렇다면, 겉포장만 화려해 보이는 이 일에 계속 매달림으로써 아버지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인가, 아니면 한 박자 쉬어가면서 내실을 찾는 자신의 인생을 살 것인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다.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손쉽게 잡는다. 발 빠르고 나무도 잘 타며 민첩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가 왜 그리 쉽게 잡힐까? 한마디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 나무나 단단한 흙더미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지켜보면 '상황 끝'이다. 원숭이는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어 음식을 꺼내려 한다. 하지만 음식을 손에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주먹이 구멍에서 빠져나오질 않는다. 심지어 사람이 다가가도 여전히 손을 움켜쥐고 있으니 소리만 지르면서 도망가지도 못한다. 끝내 음식을 포기하지 못한 원숭이는 잡혀서 음식이 되거나 팔려나간다. 천만다행으로 살아서 애완동물로 팔려가더라도 결코 자유는 없다. 모든 것을 주인님 뜻에 맡겨야 한다.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야 한다.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부처님은 포기의 달인이다.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세 가지를 포기했기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쾌락을 포기했다. 태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곧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포기하고 출가했다. 둘째는 참선하여 삼매경에 이르는 선정(禪定)을 포기했다. 출가 초기에 무소유처(無所有處) 선정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선정을 배웠다. 하지만 선정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하게 떠났다. 셋째는 고행을 포기했다. 싯다르타는 호흡을 멈추는 고행, 음식을 줄이거나 끊는 고행 등 극심한 고행을 6년 동안이나 했지만, 결국 고행이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고행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목욕을 하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기운을 차린 그는 마침내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앉아서 늙고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사유하기 시작했다.
*비상비비상처[ 非想非非想處 ]-
- 사무색처(四無色處)의 하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욕계·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무색계 제4천의 경지.
"늙고 죽음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은 생존에 대한 열망에서 온다. 생존 열망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취하려 함에서 비롯한다. 내 것으로 취함은 애착 때문이다. 애착은 느낌에서 온다. 느낌은 접촉으로 생겨난다. 접촉의 근원은 육근(六根)이다. 육근은 물질과 마음에서 분화한 것이다. 물질과 마음은 알음알이(識)에서 생겨난다. 알음알이는 의도적 행위의 결과이다. 의도적 행위
이렇게 싯다르타는 쾌락과 선정, 그리고 고행을 과감히 포기하고, 늙고 죽음의 원인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 해탈이라는 대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제 이틀 뒤면 원숭이해다. 우리 모두 원숭이를 귀감 삼아 놓을 건 놓아서 자유를 얻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