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中의 운명공동체, 美·日 혈연공동체
입력 : 2015.10.17 03:20
美, 日과 손잡고 12개국 TPP… 글로벌 교과서 써갈 세력 과시
中, 메가 경제권 '一帶一路' 구상… 日 수준의 '주연급 조연' 없어
韓, 중국판 운명공동체 발 담가… 훗날 '패배의 고통' 돌아올 수도
"우여곡절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한가족이나 똑같다." 미국 애틀랜타 웨스틴호텔 7층이었다. 이달 5일 환태평양자유무역협정(TPP) 협상을 막 끝낸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일본 경제재정장관이 마이클 프로먼 미국 무역대표부 장관을 끌어안았다. 세계경제의 4할을 차지하는 큰 경제권이 만들어진 순간 두 나라 장관은 피붙이처럼 포옹한 것이다. 혈연(血緣)공동체라 할 만큼 이해가 일치했다는 말이다.
한 달 전 중국 인민일보 주최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베이징 세미나에 참석했다. 현대판 실크로드라고 했다. 중국을 출발점으로 중앙아시아·유럽은 물론 인도·동남아까지 연결하는 초대형 경제권 구상을 홍보하는 자리였다.
첫날부터 키르기스스탄처럼 작은 나라 대표들까지 나와 지루한 축사와 연설이 이어졌다. 거기서 또렷하게 들린 단어가 '운명공동체'였다. 중국 측이 일대일로 사업으로 연결된 국가들이 운명공동체라고 말하면 카자흐스탄 대표가 찬동하는 식이었다.
중국은 그렇게 베이징 서쪽 나라들을 묶었다. 그런 중국을 보며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주변 12개 국가를 한데 모았다. 한쪽은 대륙 세력이고 다른 쪽은 해양 세력이 포진(布陣)한 형세다. 지정학 고전(古典)을 다시 떠들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맞았다.
TPP는 미국 주도로 출발했다. 일본은 서너해 늦은 2013년에 참가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는 일본이 재촉하는 모양새가 됐다. 일본 언론 보도를 보니 일본은 "우물쭈물 하지 말라"고 미국을 다그쳤다. 아마리 장관은 내각 개편이 곧 단행된다며 '귀국 카드'로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결과 마지막 회담을 20분 앞두고 미국과 뉴질랜드가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이었다. 막판 초읽기에 몰렸던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일대일로 세미나에선 이런 일본 역할을 해줄 중국의 동반자는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국과 관계는 좋지만 경제력이 취약하다. 인도는 일대일로 사업이 인도 안보에 좋지 않다는 의견을 감추지 않았다. 중국이 앞에서 끌면 따르고 중국이 미적거리면 뒤에서 밀어줄 주연급 조연(助演) 국가가 시원치 않은 것이다.
일대일로 세미나가 끝나던 날 시진핑 주석이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현지 언론은 '역사적 국빈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방문 결과는 그런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미국은 정상회담 결과를 단순한 사실확인서(Fact Sheet)로 발표했다. 반면 중국은 7시간 뒤 49가지 성과를 나열한 자료를 뿌렸다. 공동성명은 없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 발표문에 없는 '새로운 대국(大國)관계 구축'이라는 표현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중 관계 역사를 고쳐 썼다'는 해설까지 나왔다. 시 주석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듯 업적을 과대포장한 것이다. 시 주석이 기자회견에서 신형 대국관계를 거론할 때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의례적인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국에 전달되지 않았다.
오바마가 중국에 냉랭했던 이유는 곧 드러났다. TPP 협상이 끝나자 오바마는 미국 농업단체 대표 20명 앞에서 단호했다. "세계경제의 룰(Rule)은 중국 같은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과 손잡고 글로벌 경제 운용 교과서를 새로 썼다는 얘기다.
우리는 올해 중국이 설립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했다. 일대일로 사업 실행 기구이다. 대통령이 중국군 열병식도 참관했다. 우리 스스로 중국판 운명공동체에 발을 담근 것이다. 그러면서도 TPP 가입을 거부한 바람에 미·일 혈연공동체를 무시한 꼴이 됐다. 이제는 새 글로벌 교과서의 공동 저자가 되지 못하고 부록에 이름을 넣어달라고 조르는 처지가 됐다.
미국 대통령, 부통령이 연달아 박근혜 대통령에게 오찬을 냈다고 한다. 청와대는 미국의 환대를 연일 자랑한다. 박 대통령도 혈맹을 강조했다. 6·25 전쟁 때 중국과 싸우며 맺었던 혈연공동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미 대중(對中) 전선에서 미국과 함께 중국에 맞설 의사가 없다는 신호를 여러 번 미국에 보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의를 미루고,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난사군도 문제에도 아예 입을 다물었다. 박 대통령은 한·미 혈맹이란 북한이라는 좁은 전선에서만 유효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며칠 전에도 미 국방부와 가까운 유력 연구소가 중국의 대만·난사군도 공격을 가정한 미·중 전쟁 시나리오를 공개했다. 미국의 중국 경계심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일본은 그걸 알고 있고 우리는 모른다. 미·중 사이에서 가중치를 어느 쪽에 무겁게 둬야 하는지 무시한다. 벌써 워싱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작은 에러가 대량 실점으로 연결되곤 하는 게 야구의 징크스다. 패배의 고통을 맛본 뒤에야 2015년에 우리가 어떤 에러를 범했는지 떠오를 것이다.
한 달 전 중국 인민일보 주최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베이징 세미나에 참석했다. 현대판 실크로드라고 했다. 중국을 출발점으로 중앙아시아·유럽은 물론 인도·동남아까지 연결하는 초대형 경제권 구상을 홍보하는 자리였다.
첫날부터 키르기스스탄처럼 작은 나라 대표들까지 나와 지루한 축사와 연설이 이어졌다. 거기서 또렷하게 들린 단어가 '운명공동체'였다. 중국 측이 일대일로 사업으로 연결된 국가들이 운명공동체라고 말하면 카자흐스탄 대표가 찬동하는 식이었다.
중국은 그렇게 베이징 서쪽 나라들을 묶었다. 그런 중국을 보며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주변 12개 국가를 한데 모았다. 한쪽은 대륙 세력이고 다른 쪽은 해양 세력이 포진(布陣)한 형세다. 지정학 고전(古典)을 다시 떠들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맞았다.
TPP는 미국 주도로 출발했다. 일본은 서너해 늦은 2013년에 참가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는 일본이 재촉하는 모양새가 됐다. 일본 언론 보도를 보니 일본은 "우물쭈물 하지 말라"고 미국을 다그쳤다. 아마리 장관은 내각 개편이 곧 단행된다며 '귀국 카드'로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결과 마지막 회담을 20분 앞두고 미국과 뉴질랜드가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이었다. 막판 초읽기에 몰렸던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일대일로 세미나에선 이런 일본 역할을 해줄 중국의 동반자는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국과 관계는 좋지만 경제력이 취약하다. 인도는 일대일로 사업이 인도 안보에 좋지 않다는 의견을 감추지 않았다. 중국이 앞에서 끌면 따르고 중국이 미적거리면 뒤에서 밀어줄 주연급 조연(助演) 국가가 시원치 않은 것이다.
일대일로 세미나가 끝나던 날 시진핑 주석이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현지 언론은 '역사적 국빈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방문 결과는 그런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미국은 정상회담 결과를 단순한 사실확인서(Fact Sheet)로 발표했다. 반면 중국은 7시간 뒤 49가지 성과를 나열한 자료를 뿌렸다. 공동성명은 없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 발표문에 없는 '새로운 대국(大國)관계 구축'이라는 표현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중 관계 역사를 고쳐 썼다'는 해설까지 나왔다. 시 주석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듯 업적을 과대포장한 것이다. 시 주석이 기자회견에서 신형 대국관계를 거론할 때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의례적인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국에 전달되지 않았다.
오바마가 중국에 냉랭했던 이유는 곧 드러났다. TPP 협상이 끝나자 오바마는 미국 농업단체 대표 20명 앞에서 단호했다. "세계경제의 룰(Rule)은 중국 같은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과 손잡고 글로벌 경제 운용 교과서를 새로 썼다는 얘기다.
우리는 올해 중국이 설립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했다. 일대일로 사업 실행 기구이다. 대통령이 중국군 열병식도 참관했다. 우리 스스로 중국판 운명공동체에 발을 담근 것이다. 그러면서도 TPP 가입을 거부한 바람에 미·일 혈연공동체를 무시한 꼴이 됐다. 이제는 새 글로벌 교과서의 공동 저자가 되지 못하고 부록에 이름을 넣어달라고 조르는 처지가 됐다.
미국 대통령, 부통령이 연달아 박근혜 대통령에게 오찬을 냈다고 한다. 청와대는 미국의 환대를 연일 자랑한다. 박 대통령도 혈맹을 강조했다. 6·25 전쟁 때 중국과 싸우며 맺었던 혈연공동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미 대중(對中) 전선에서 미국과 함께 중국에 맞설 의사가 없다는 신호를 여러 번 미국에 보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의를 미루고,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난사군도 문제에도 아예 입을 다물었다. 박 대통령은 한·미 혈맹이란 북한이라는 좁은 전선에서만 유효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며칠 전에도 미 국방부와 가까운 유력 연구소가 중국의 대만·난사군도 공격을 가정한 미·중 전쟁 시나리오를 공개했다. 미국의 중국 경계심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일본은 그걸 알고 있고 우리는 모른다. 미·중 사이에서 가중치를 어느 쪽에 무겁게 둬야 하는지 무시한다. 벌써 워싱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작은 에러가 대량 실점으로 연결되곤 하는 게 야구의 징크스다. 패배의 고통을 맛본 뒤에야 2015년에 우리가 어떤 에러를 범했는지 떠오를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