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高祖)부터 부모(父母)님까지 사 대를 모신 산이 팔려서 산소를 종중(宗中) 묘지로 이장(移葬)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와 집사람은 고향(故鄕)인, 적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운반해준 이슬비가 차 안에 흐르던 삶과 죽음에 대한 무거운 침묵(沈默)을 날려 보냈다. " 상역이 엄마는 몇 차례나 적성 부대 앞을 배회(徘徊)하면서 눈물을 흘렸대요." 우리 아들애 친구인 상역이는 얼마 전 입대하여 이 근처 부대로 배치를 받아 훈련 중인데 면회(面會)가 허락되지 않아서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혹시 얼굴이나 볼 수 없을까? 하는 심정(心情)으로 이곳으로 차를 몬다는 것이다.
"사제(私製) 옷 받았을 때도 울었겠네?"나는 여자 동창이 부대에서 보낸 자식의 옷가지를 받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기에 대고 울음을 터트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는 자식 얼굴에서 발견되는 작은 그늘에도 가슴이 아리다. 부모(父母)를 자식에게 쏟는 정성(精誠)의 십 분의 일만큼만 배려한다면 이 세상 모든 노인은 얼마나 행복해 질까?
나는 상혁이가 바람직한 교육적 가치와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애정이 더 가는지도 모른다. 그는 과외를 받지도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다. 그리고 강남 병(江南病)에도 전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순박한 청년이다.
이 시대의 중년(中年)은 자식을 생각 없는 늑대로 키워야 하는 비련(悲戀)의 주인공(主人公)이다. 빈부(貧富)에 관계없이 이 나라의 부모(父母)는 자식을 일류 대학에 보내고자 비싼 수강료를 지급하면서 사설학원에 보내야 하고, 입학한 후에도 국외 연수 및 유학비를 부담해야 하며, 졸업 후 그 어렵다는 취직을 해도 서울에 오천만 원짜리 아파트 전세를 얻어 주어야만 한다. 결국, 등골이 빠진 가난한 부모는 몰지각하게 자란 자식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로 나앉게 되어 추운 거리에서 부부 싸움을 하다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되어있다.
이렇게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자신(自信)을 배제하고 강남(江南)의 법칙과 관습에 따르는 부모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양심(良心)과 환희(歡喜)를 느낄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황폐(荒幣)한 정신(精神)을 가슴에 안고 사막을 전전하다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이 시대(時代)를 사는 중년(中年)은 선반 위에 장식(裝飾)으로 올려놓은 절대적(絶對的)인 가치(價値)를 사용하여야 한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이야기하듯이 사람들이 기득권자(旣得權者) 들의 세속적(世俗的)인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고 자기 행동에 대한 어떤 가책이나 책임감이 수반되지 않는 편안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겨울보다 추운 한기를 느끼면서 산으로 올랐을 때, 유골을 칠성판 위에다 추린 후에 창호지로 싸고 나서 하얀 천으로 단단하게 묶어서 이장할 장소로 옭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영령(英靈)들은 그들이 새로 단장한 집으로 이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보면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귀(鬼)는 음지령(陰之靈)이고, 신(神)은 양지령(陽之靈)이라 하였다. 즉, 생물을 구성하는 본질은 음과 양의 두 기(氣)이며, 이 두 기의 영(靈)이 그 생물에서 떠나는 경우에 혼(魂) ·백(魄) ·정(精) ·신(神) 또는 귀신이 되고, 이들 혼백 및 귀신의 존재 기간은 장단(長短)이 있어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산에서 존재하던 소나무가 그 수명을 다하여 무기질이 되면서 소나무라는 정체성(Identification)을 버리고 그냥 이름없는 기(氣)로 떠돌아다니듯이 인간의 영혼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최아무개 송아무개 하는 개개인의 정체성은 소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유골(遺骨)에 옷을 다시 입혀 드리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서 상여로 어머니를 이곳에 모실 때의 아픔이 떠올랐다. 초여름 쇠꼬챙이같이 날카로운 햇살이 머리와 가슴을 찔러대었다. 메마르고 답답한 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일제(日帝)와 육 이 오 전쟁에서 모진 고난을 경험한 우리 무모 세대는 삶 자체가 불행이고 비극이었다. 중년이 된 우리에게 부모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아는 중년 부인은 그녀의 친정어머니를 "정신병자"라고 부른다. 팔등신 미인에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일자 눈썹을 가진, 자존심 높은 아가씨는 잘나가는 사(士)자 붙은 남자와 결혼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살다가 오십이 다된 중년(中年)에 된서리를 맞았다. 남편이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나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삵을 세 보증금마저 없었던 그녀는 낯선 거리로 나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책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생수를 마시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던 그녀는 길가에서 하체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줄기를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친정은 만평이 넘는 땅을 경작하는 대농(大農)이었고, 남동생을 위하여 자신의 상속분까지 포기했던 자신에게 삵을 세 보증금조차 꾸어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냉정한 태도에 그녀는 황당해하면서 한 편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왜?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장자(長者)에게만 그들이 이룬 모든 것, 재산(財産), 가업(家業) 애정(愛情) 등을 물려주려 고할까? 아들에게 더 많은 재산을 상속하고자 딸의 참혹한 사정을 외면하는 어머니보다는 차라리 남이 더 낫지 않을까? 그녀는 친정에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편애(偏愛)를 하며 애지중지 키운 큰아들 집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잘난 며느리 눈총에 손자에게 눈길 한번 못 주고, 단 칸 방에 갇혀서 소파 없는 응접실을 기웃거리면서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사오십대의 며느리들은 온 종일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프로를 돌려대면서 끼니만 챙기는 노인네를 보고 있을 만큼 인내심(忍耐心)이 강하지 못하다.
이 시대(時代)의 중년 며느리들은 늙고 병들어 지각(知覺)이 없는 시 부모의 시 자만 나와도 증오심(憎惡心)이 끓어오르는 야수다. 이들은 인간(人間)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음(陰)한 기운이 천천히 자리 잡는 저녁때 이장 작업이 끝났다. 소음인인 나와 궁합이 잘 맞는 단너삼 뿌리 삼계탕을 안주로 같이 일한 사람들과 소주를 마음껏 마셨다. 그리고 내가 지나치게 편애(偏愛)하는 김 춘 수의 꽃을 읊조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인식(認識)을 잃어버린 시대(時代)에 살고 있다. 이 시대(時代)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人間)이 얼마나 고귀(高貴)한 존재(存在)이며,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存在)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중생(衆生)이다.
대기(大氣)에 떠돌던 목화 솜 뭉치가 나무가 내 품는 숨결에 밀려와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같은 중년은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 뜨거운 여름날에 ‘카뮈’의 ‘뫼르소’가 쏘는 총알이 뇌를 관통했을 때나 영화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가 던진 눈물 폭탄이 가슴에 터졌을 때에도 나는 죽음을 생각했지만, 모든 것은 세월이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중년은 시간이 촉박하다. 만약 지금 병을 고치지 못하고 불치의 몸으로 입관되면, 원혼(寃魂)이 되어 영원히 구천을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 부딪혀 좌절할 때마다 초심(初心)을 들먹인다. 초심(初心)은 없다. 고뇌로 가득 찬 낙타의 혹과 포획의 야성(野性)을 간직한 사자의 발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호화로운 궁전에다 영원(永遠)히 사는 신을 모셔 놓고, 유한(有限)한 세계에서 정의롭게 살아가고자 고분 분투하는 백성의 삶을 조소하면서 언어의 축포를 터트리는 목회자(牧會者)의 초심(初心)은 교회인가? 불당인가? 아니면 예배 의식인가? 인간(人間)은 유한(有限)을 통해서 만이 영원(永遠)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를 왜 그들은 부정하는 것일까?
이 시대(時代)의 중년(中年)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도봉산역에서 드넓은 치마폭에 수백 마리의 노란 꾀꼬리 새끼를 안고서 함박눈을 맞고 서 있는 목련화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이상적인 늙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기 모 방송국에 반영된 노부부의 이야기를 인용(引用)한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면 강원도 홍천군 문암마을은 고립무원이 된다. 산토끼가 눈 덮인 마당에 발자국을 만드는, 새소리, 바람소리뿐인 적막강산. 문암마을 전체가 굽어 보이는 200년 된 귀틀집에서 반백 년 된 가마솥으로 밥을 지어 먹으며 61년 전 백년가약을 맺고 사는 부부가 있다.
산 넘어 산 속에는 4가구가 마을 주민의 전부인 문암마을은 이웃에 마실 한번 다니려 해도 삼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산간 오지마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문암마을에서도 가장 깊숙한 산골짜기로 전쟁과 세파를 피해 들어온 것은 약 50년 전. 비록 부족한 것 많은 산중이었지만 정성과 사랑으로 자녀를 키웠기에 여덟 남매는 효심 지극하고 성품 바르게 자라 각자 가정을 이뤘다.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에 매일같이 전화로 안부를 여쭙는 자녀. 그러나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을까지 차가 들어올 수 없어 한겨울 산속 귀틀집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 된다.
그 산골에 여든두 살 청년이 산다. 자연에서 의식주의 대부분을 해결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영하의 날씨에도 할아버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겨울 산을 오른다. 눈 덮인 가파른 산등성이를 휘적휘적 오르시는 할아버지는 여든두 살의 청년이다. 망태, 끈, 절굿공이에 설피까지.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 내는 맥가이버 주시용 할아버지. 그러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재주는 많아도 여자에게 잘할 줄을 모르는 옛날 양반’이라며 ‘남편 정이 아닌 시어머니 정으로 살았다.’라고 털어놓는데, 하지만 할머니의 불편한 다리를 위해 손수 좌변기까지 만든 할아버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새벽에 눈뜨자마자 산에 올라 그 자신이 수없이 밟고 다녀서 곱게 빻은 백설기 가루같이 차진 오솔길을 지나서 구름을 향해 자란 소나무에서 퍼져 나오는 자연의 기(氣)를 음미하면서 눈 덮인 대지에 엎드려 신과 경건한 대화를 나눈다. 그는 얼음이 채 녹기 전인 2월 말에 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초까지 계속해서 노란 꽃이 피는 산수유나무 열매를 따고 죽은 나무를 찾아 온산을 헤매다가 해가 져야 집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나는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인간(人間)과 인간(人間) 과의 대화가 얼마나 무의미한가?”에 대한 회의에 짜졌다. 인간(人間)이 입을 통해 내뱉는 모든 것, 언어와 시와 철학과 신앙은 모두 업보(業報)일 뿐이다.
늘 자연과 대화하며 신에게 기도하는 노인의 건강한 얼굴에서는 ‘김춘수’ 시인의 안경 속과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어깨너머에 감춰진 고독과 허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안타깝게 느낀 것은 오히려 늙은 아버지를 걱정하는 큰아들의 얼굴에 새겨진 수심(愁心)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인간에게 기생(寄生)하던 검은 그림자는 무엇에 쫓겨서 그에게서 도망쳤을까? 그것은 희망일 것이다. 희망은 죽음과 언어를 삼킨 정화(淨化)된 고달픈 육체가 산에 올라 인생(人生)은 허무(虛無)도 고독(孤獨)도 아니라고 절규(絶叫)하는 것이다. 그렇다. 중년의 희망(希望)은 정화된 육체 위에 찾아오는 산스크리트(Sanskrit)이며 마태복음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다.
2004.04.22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