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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希望)

최만섭 2007. 1. 20. 19:45

 

나이 오십에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질문은 `왜 당신은 글을 쓰느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은 세상에 대한 애증(愛憎)과 희망(希望)에 대한 필사적인 미련(未練) 때문이다. 몇 일전 텔레비전에서 카드 빛에 쪼들린 젊은 아낙이 고층 아파트에서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그녀 자신도 젖먹이를 품에 안은 채로 떨어져서 스스로 생(生)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오죽하면 그런 짓을 했겠느냐는 동정심(同情心)과 함께 아무리 부모(父母)라도 인간의 생명(生命)을 빼앗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憤怒)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만의 소의(素意)는 아닐 것이다.

 

나는 오 십여 년 전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 이 오 전쟁이 발발하자 나의 어머니는 연로(年老)한 시어머니와 병든 남편을 앞세우고 젖먹이를 등에 업은 채, 일곱 살과 다섯 살 먹은 남매의 손을 이끌면서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쌀 한 가마니를 실은 황소는 지뢰를 밟아 달아났고, 큰애는 지뢰파편에 허벅지를 맞고 길 모퉁이에 내동댕이쳐졌다가 지나가던 미군 위생병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扶持)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소진된 늙은 시어머니와 병든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은 편히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이 연못에 빠져 죽자!`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씀하셨다. 죽음같이 긴 침묵이 흐른 후 큰 애가 울부짖으며 대답했다. `나 죽기 싫어요.` 두터운 초록색 연꽃 잎사귀 위로 쟁반만 한 이슬이 흐르고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새끼의 눈물을 본 젊은 아낙은 식구들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흐느꼈다. `내가 죽일 년이지. 왜 그런 못된 생각을 했을까?`

 

다음날 토굴(土窟)에 거처를 정한 어머니는 집을 나와 조그만 장터 생선가게 앞에서 적당한 어둠이 그녀의 얇은 낮을 가려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주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제가 새벽부터 가게 앞에 서서 지켜보았는데요. 제게 생선을 떼어 주신다면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거든요.` 생선 장수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양동이에 생선을 가득 담아 어머니 머리에 얹어 주었다.

 

어머니의 생선 장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선을 주고 쌀도 받고 고구마도 받고 좁쌀도 받았다.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生活) 속에서도 그녀가 행복(幸福)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침마다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아픈 상처와 부끄러운 허물을 감싸 주는 가난한 이웃의 인정(人情)은 어머니의 희망(希望)이며 행복(幸福) 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코러스도 없이 희망(希望)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왔다. 지천명(知天命)의 고개를 넘던 날, 나는 뭍에서 떨어진 무인도(無人島)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이러한 소외(疏外)와 고독(孤獨)에 개의(介意)치 않는다. 내가 뭍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다른 고독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 위의 풍랑을 극복할 때 느끼는 자긍심과 성취감만을 유일한 희망(希望)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수면(水面) 밑에도 고요하게 흐르는 고독이라는 희망(希望)이 존재하는데 말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가련한 여인은 그녀의 풍만한 젖 가슴을 풀어헤칠 따스한 봄바람은 결코 불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졌었을 것이다. 나는 이 아낙에게 수면(水面) 밑 수궁(水宮)의 찬란한 봄을 선사 하고싶다.

 

나는 내일 다시 태어나 어머니가 만난 생선장수 아저씨의 인정 어린 손등을 어루만지며 연못을 바라보려고 한다. 희망은 절망(絶望)하여 비탄(悲嘆)에 젖은 가엾은 여인에게 내미는 따스함이기 때문이다. 양쪽 세계를 인지(認知)하고 조심스럽게 왕래(往來)하는 마음씨 여린 백성(百姓)에게 희망(希望)은 항상 존재(存在)한 다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