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보이저호, 65년간 태양계 탐사… 민주주의 저력 보여준 NASA 프로젝트

최만섭 2022. 6. 20. 05:17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보이저호, 65년간 태양계 탐사… 민주주의 저력 보여준 NASA 프로젝트

입력 2022.06.20 03:00
 
 
 
 
 

1961년 2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에 미항공우주국(NASA)의 국장으로 제임스 웹(James Webb)을 임명한다. 재무부 예산국장을 거쳐 국무 차관까지 지낸 그는 전형적 관료였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았던 그가 발탁된 것은 우주개발에 행정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며 우주 경쟁이 벌어졌지만, 미국은 여전히 소련에 뒤지고 있었다. 얼마 뒤,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그래픽=백형선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다. 집권 초 케네디 민주당 정부는 다급해졌다. 앞서 스푸트니크 쇼크 당시 우주개발에 손을 놓고 있다고 공화당을 공격했는데, 민주당 집권 후에 소련이 더 큰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유리 가가린 우주 비행 이틀 후인 4월 14일 미 백악관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제임스 웹은 소련을 단번에 추월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인간을 달에 보내자는 것. 하지만 필요 예산이 380억달러에 이른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금 보유량을 모두 합해도 178억달러어치였다. NASA 연구원들조차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웹은 가능하다고, 아니 가능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기술이나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어렵고 복잡한 과제일수록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교체되기 마련이고, 같은 정권이라도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이 달라진다. 과학자들이 회의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제임스 웹은 달랐다. 민주 국가에서 이것이 가능해야만 독재 체제나 통제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라 믿었다. 이에 깊이 공감한 케네디는 회의적 여론에도 제임스 웹의 손을 들어주었다.

1961년 5월 25일 케네디는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한다. 인류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부처들을 설득하고,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느슨하고 분산된 NASA 조직의 재정비도 필요했다. 이 모든 과정에 제임스 웹이 있었다. 그는 여론도 꼼꼼히 살폈다.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이 미국인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하며 스타가 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존 글렌을 미디어에 드러내며 소련에 뒤지지 않는 NASA 이미지를 구축한다. 우호적 여론에 예산을 호소하자, 의회는 만장일치로 화답했다.

모두가 달에 갈 생각에만 빠져 있을 때, 그는 엄청난 국민 세금이 투입된 프로젝트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폴로 계획으로 빠듯한 예산에도 다른 행성 탐사를 병행했다. 어렵게 얻은 성과가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금성과 화성 탐사를 위해 마리너(Mariner) 계획을 지원하고, 중단된 파이오니어(Pioneer) 계획을 되살려 목성과 토성을 탐사했다. 파이오니어 계획으로 확보된 목성과 토성 자료는 마리너 계획과 결합하여 보이저(Voyager) 계획으로 발전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진 않았다. 천문학적 예산 투입에도 아폴로 우주선 발사는 지연되다가 1967년에야 처음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발사, 즉 아폴로 1호는 출발도 못 한 채 지상에서 불타 세 우주인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여론이 급변했다. 당시 미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재정은 파탄 나고 있었다. 게다가 인종 간 계층 간 갈등으로 쌓인 불만은 아폴로 사고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다. 달 탐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찬성의 2배에 달했다.

제임스 웹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즉각 조사에 착수해, 온갖 청문회에 불려 다니며 사고 원인과 대책에 대해 가감 없이 증언했다. 이 과정이 언론에 노출되자 수많은 공격이 그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이는 그가 의도한 것이다. 여론의 화살이 제임스 웹으로 쏠리게 만들어 NASA에 대한 신뢰는 훼손되지 않게 했다. 그 결과 곧 달 탐사가 재개된다. 사고가 수습되고 아폴로 계획이 제 궤도에 오르자 1968년 10월 그는 사임한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불과 아홉 달 전이었다.

그가 되살린 파이오니어 계획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탐사선을 발사했다. 1972년 발사된 파이오니어 10호는 2003년 임무가 종료되었으니 파이오니어 계획은 무려 45년간 계속된 것이다. 1960년 시작된 마리너 계획은 1962년 마리너 1호를 시작으로 마리너 11, 12호가 1977년 보이저 1, 2호로 이름을 바꾸어 발사되어 아직 활동 중이다. 2025년 보이저호의 임무가 종료되면 65년간 이어진 프로젝트가 된다. 아폴로 계획의 후속으로 1972년 시작된 우주왕복선 계획은 2011년 종료되었다. 39년짜리 프로젝트였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그를 기리는 ‘제임스 웹’이라는 이름의 초대형 망원경이 우주로 발사되었다. 허블 망원경을 대체하는 이 프로젝트는 1989년 예산 5억달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중간에 설계가 변경되고 보완되며 32년 동안 97억달러가 투입되었다. 수십 년간 ‘돈 먹는 하마’라는 평가를 받던 이 프로젝트를 지속할 수 있던 저력은 제임스 웹에게서 비롯되었다. 여러 논란에도 NASA라는 기술적 자산이 여전히 탄탄한 바탕에는 이처럼 뛰어난 행정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제임스 웹의 가장 큰 업적은, 한 국가가 거대한 위협을 마주했을 때, 설령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민주주의가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과학으로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