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내 마음 훔친 노란 꽃… 너의 이름은?

최만섭 2018. 4. 7. 11:24

내 마음 훔친 노란 꽃… 너의 이름은?

봄이면 아직 설렌다. 주책스레 호들갑 떠는 마음에 박자 맞춰주러 봄꽃 여행 떠났다. 산에서 들에서 때론 시멘트 덮은 먼지에서 피어나는 꽃을 찾아다녔다.
야생화 사진과 이름 담긴 출석부 한 권 끼고 경기 남양주 천마산으로 향했다. 완만한 등산로에 야생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유명해지며 '야생화 성지'라고 불린다.

입력 : 2018.04.06 04:00 | 수정 : 2018.04.06 10:34

[cover story] 천마산 야생화
수줍게 핀 야생화에 설레는 봄… 사진과 이름 담긴 '출석부' 들고 만나러 갑니다
福과 長壽 부른다는 '복수초', 고양이 소화제라는 '큰괭이밥'…
땅에 얼굴 박고 봄날의 '보물찾기'

인연은 이름에서 시작한다. 봄 새 학기 출석 시간이 기다려졌던 건 네 이름 석 자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이름 받아 적은 연습장 황급히 찢어 가방에 감춘 건 혹시라도 마음 들킬까 떨려서였다. 끝끝내 그 이름 부르지 않은 건 용기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인연이 좋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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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천마산 깊은 계곡 싱그러운 이끼 그득한 바위에 피어오른 ‘만주바람꽃’. 지금은 노란빛이 돌지만, 4월 중순 활짝 피어오르면 새하얗게 변한다. 만개(滿開)를 준비하는 모습이 산뜻해 꽃 몰래 사진에 담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야생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짝사랑'이라 표현한다고 한다. 눈에 불을 켜고 꽃을 찾아다니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혹시라도 밟을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 가지기 위해 꺾지는 못하면서, 누가 혹시 그 매력 알아보고 헤집을까 걱정돼 좋아하는 마음 숨긴다. 모든 짝사랑이 그러하듯, 꽃은 저를 보려는 사람에겐 관심 없다.

더는 인생에 출석 시간이란 것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관성이 남아 봄이면 아직 설렌다. 주책스레 호들갑 떠는 마음에 박자 맞춰주러 봄꽃 여행 떠났다. 눈물 나게 화려해 모든 이가 갈망하고, 그래서 텔레비전 속 연예인처럼 관리되고 꾸며진 그런 꽃 말고. 산에서 들에서 때론 시멘트 덮은 먼지에서 피어나는 꽃을 찾아다녔다. 진정 마음 설레게 한 이들은 모두 야생화를 닮아서다.

옆구리에 야생화 사진과 이름 담긴 출석부 한 권 끼고 경기 남양주시 천마산으로 향했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평범한 산인데 완만한 등산로에 야생화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유명해지며 지금은 '야생화 성지'라고 불린다. 혹시 인연 엇갈릴까 걱정돼 야생화 사진을 찍으면 이름을 알려준다는 '야생화 인식' 앱까지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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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숲 해설가 이종봉

지난달 31일 오후 찾은 천마산은 등산로 초입부터 수줍게 야생화 훔쳐보는 이들로 활기찼다. "쟤가 현호색이라는 애잖아. 그 옆에 애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사람 말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꽃을 앞에 두고 서로 소곤소곤한다. 저 멀리 메마른 낙엽 사이에 피어오른 노란빛에 이끌려 발을 옮겼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데 이름은 몰랐던 야생화가 수줍게 고개 내밀었다. 인연은 이름에서 시작하기에 옆구리에 낀 출석부 들어 책장 넘긴다. 너의 이름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야생화를 생각하면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먼저 떠오른다. 시는 대개 현실을 과장하지만, 이 시만큼은 사실이다. 어디 숨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야생화는 크기마저 새끼손톱보다 작은 것이 많다. 자세히, 오래 보지 않으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천마산에 들어서자 먼저 보인 건 야생화가 아니라 민망하게도 등산객들 엉덩이였다. 금이라도 떨어졌는지 땅에 얼굴을 박고 감탄하는 이들 모습은 사연을 모르고 보면 당황스러울 테다. 무얼 그리 열렬히 바라보나 다가갔다. 노란 잎을 잔뜩 껴입은 꽃 하나가 낙엽 사이를 비집고 피어올랐다. 출석부 꺼내 소속 확인한다.

그의 이름은 복수초(福壽草). 복과 장수를 가져다주는 풀(草)이라는 뜻에서 복수라는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복수씨는 워낙에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초봄에 꽃을 피울 때면 그 열기로 주변의 눈과 얼음마저 녹인다. 얼음을 녹이면서 피
는 꽃이라고 해 ‘얼음새꽃’ 이라고도 한다. 빠르면 2월 말에 모습을 드러내 5월까지 핀다. 햇볕 잘 들면서도 땅은 약간 습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꽃말은 ‘영원한 행복’. 복과 장수를 얻었으니 이만한 행복 어딨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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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숲 해설가 이종봉

아직 초봄이라 대부분 나무가 잎도 안 틔었는데, 벌써 노란 꽃 내세운 나무 있어 다가갔다. 산수유와 비슷하게 생겨 종종 오해받아 억울하다는 생강나무. 사실 자세히 알고 보면 둘은 꽃도 잎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르다. 3월 초봄 산에 피어난 꽃은 대부분 생강나무다. 공원이나 도로 주변에 피어났다면 대개 산수유다. 그래도 헛갈린다면 숨 크게 들이쉬고 눈 감아본다. 달착지근하면서 알싸한 생강 냄새가 코끝을 찌르면 생강나무다.

이름 때문에 생긴 오해도 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 혹은 동박나무로 불렀다고 한다. 즉 강원도에서 말하는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이다. 1930년대 강원도 사는 열일곱 순박한 남녀의 사랑을 다룬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도 사실은 이 생강나무꽃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스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했다.’ 동백꽃 속 주인공들이 고마 아찔하게 무슨 일을 벌였는지 다 봤을 생강나무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영 야생화가 안 보인다면 나무 밑을 유심히 쳐다보며 다니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잎 모두 털어낸 나무 밑에서 쑥스럽게 혼잣말하는 새색시 발견했다. 이름은 개별꽃. 별 모양을 닮아 ‘개별’이란 이름 붙여졌다. 5개의 새하얀 꽃잎 위에 노란색·적색 꽃밥 10개가 늘어져 있다. 이 때문에 멀리서 보면 새색시 하얀 얼굴에 연지곤지 찍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식물 이름 앞에 ‘개’ 자가 붙으면 보통 먹을 수 없거나 크기가 작아 볼품없기 마련인데 개별꽃은 예외다. 어린 순은 봄나물로 먹고 치질약으로도 쓰이고, 뿌리가 인삼의 어린뿌리인 묘삼을 닮았는데 맛도 인삼 맛이 난다. ‘들에 나는 별을 닮은 꽃’이라는 뜻에서 ‘들별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따뜻한 4~5월이면 주로 산속 나무 밑에 귀엽게 피어 있다. 그래서 꽃말은 ‘귀여움’이다.

야생화가 사람들 좋아하라고 등산로 근처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진 않다. 그래서 천마산에는 산길인 듯 아닌 듯한 길이 여럿 나 있다. 이 길 저 길 헤매다가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으면, 뭔가 있나 보다 싶어 이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스마트폰 들고 열심히 사진 찍는 등산객 있어 다가가니 그 앞에 푸른색 꽃들 비밀스레 모였다. 이름은 점현호색(點玄胡索). 검은색(玄) 뿌리를 가졌고, 중국 북방민족인 호족(胡族)이 사는 지역에 살고, 땅속줄기가 매듭 모양으로 꼬여(索) 있어 현호색이라 불린다. 잎에 점무늬가 있는 종류는 점현호색이라고 한다. 꽃잎이 한쪽으로 몰려 피는데 그 모양이 마치 색소폰을 연상케 한다. 4~5월에 산록의 습기가 있는 곳에서 핀다. 꽃말은 ‘비밀’이다.

야생화, 너의 색깔은… 인연은 이름에서 시작하고, 추억은 색으로 남습니다. 산에서 들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야생화를 떠올리며 색칠해 보세요.
야생화, 너의 색깔은… 인연은 이름에서 시작하고, 추억은 색으로 남습니다. 산에서 들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야생화를 떠올리며 색칠해 보세요.

야생화 보는 시간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 사이가 가장 좋다. 어떤 꽃은 낮에만 꽃잎을 열었다가 해가 지면 추위를 피하려 잎을 오므리기 때문이다. 곤충이 없는 시간에 굳이 꽃 피워 에너지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큰괭이밥이다. 계곡 근처에 피어 있었는데 운 좋게도 시간이 일러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괭이’는 고양이의 사투리다. 고양이들이 소화불량에 걸리면 소화제로 뜯어 먹는 풀이라고 해 ‘괭이밥’이라 불린다. 꽃잎이 황색인 괭이밥과 달리 이날 본 큰괭이밥은 꽃잎이 흰색이다. 립스틱 칠한 듯 꽃잎 중간에 발칙한 빨간색 줄이 여러 개 있다. 자신을 선명하게 내보여 곤충을 유혹하는 ‘허니가이드’다. 5~8월에 꽃을 피우는 괭이밥들이 고양이한테 먹힌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눈치 빠른 큰괭이밥은 3월 말에서 5월이면 꽃을 피운다. 계곡 주변이나 습도가 있는 바위틈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흔치는 않다. 꽃말은 ‘빛나는 마음’. 유혹엔 때로 빛나는 외모보다 빛나는 마음이 먹힌다.

“설마 저기에도 꽃이 필까” 하는 곳에도 야생화는 핀다. 그늘진 바위 사이에 혹시 몰라 얼굴 들이밀어 보니 검은 자색 꽃이 피어 있었다. 이름은 미치광이풀. “나 미쳤으니 건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듯 꽃은 시크하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 풀에는 신경 자극 성분이 들어 있다. 큼직한 잎이 깻잎처럼 먹음직스럽게 생겼는데 잘못 먹으면 소화기 계통의 마비를 가져오고 호흡이 느려지며 발열·흥분·불안·환각 등 증상이 나타난다. 소가 풀인 줄 알고 먹었다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고 미치광이풀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어딜 가도 미친 인간 한둘은 반드시 있듯, 4월 말이면 전국 어느 산속에서나 돌 많은 계곡 근처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꽃말은 ‘미치광이’.

자태가 워낙 강렬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꽃도 있다. 꽃잎을 뒤로 활짝 젖혀 암술과 수술을 대담하게 드러낸 얼레지가 그렇다. 녹색 이파리 여기저기에 자줏빛 얼룩이 있다. 미치광이풀의 묘한 매력에 빠져 있는데, “걔가 뭐라고 그리 열심히 보냐”고 투덜대는 듯 큼지막한 보라색 꽃잎 여섯 장을 열어 젖뜨리고 긴 꽃술을 밖으로 쭉 내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레지는 씨앗이 떨어져 꽃이 필 때까지 7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오랜 세월 견뎠는데 곤충들이 쳐다보지 않는다면 섭섭할 만도 하다. 4월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 주로 핀다. 꽃말은 ‘질투’.

천마산야영교육장을 지나 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천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천마산 계곡으로 난 길이다. 계곡 방향으로 험하게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4~5월에 피는 바람꽃의 군락지가 있다. 보기 어려운 야생화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고 해 야생화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하늘정원’이라 불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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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사는 ‘백두산떡쑥’. 5~6월이면 꽃을 피운다. 남쪽에서는 보기 어려운 희귀종으로, 야생화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선 ‘통일되면 보고픈 야생화’로 꼽힌다./숲 해설가 이종봉

하늘정원에서 처음 만난 꽃은 순백의 꽃잎을 활짝 펼친 모양이 꿩의 발자국을 닮았다는 꿩의바람꽃. 그 옆에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주 작은 꽃이 있어 ‘너도 바람꽃인가?’ 의아해 출석부 꺼냈다. 그 작은 꽃 이름은 너도바람꽃. 보통 원종보다 좀 모자란 느낌이면 ‘너도’가 붙고 우월해 보이면 ‘나도’가 붙는다고 한다. 너도바람꽃은 꽃대가 10㎝ 내외인데 나도바람꽃은 30㎝ 이상 자란다. 나도바람꽃은 강원도 이북에서 자라 천마산에서는 찾기 어렵다.

계곡 쪽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이번엔 만주바람꽃이 펴 있었다. 바람꽃은 습한 곳을 좋아해 물이 있는 곳 주변에 많이 핀다. 애처로운 그리스 신화도 있다. 꽃의 여신 플로라에게 아름다운 시녀 아네모네가 있었다. 남편인 바람의 신 제프로스와 아네모네가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플로라가 질투심에 아네모네를 바람꽃으로 만들었고, 슬픔에 빠진 제프로스는 해마다 봄이 오면 따뜻한 바람을 불어 아네모네가 화사하게 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람꽃은 따뜻한 햇볕이 있을 때만 꽃잎을 열고, 해가 져 쌀쌀해지면 꽃잎을 닫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꽃말은 ‘덧없는 사랑’ ‘금지된 사랑’ ‘사랑의 괴로움’이다.

좀 더 계곡 깊숙이 들어가는 모험을 하면 천마산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을 만날 수 있다. 희귀 야생화 금괭이눈이다. 천마산에서만 자란다고 해 ‘천마괭이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괭이눈은 대부분 이삭 잎의 절반만 노란데, 금괭이눈은 전체가 샛노래 눈이 부시다. 금괭이눈 군락지에 다다르자 싱그러운 이끼 바위에 금빛 물결이 일었다. 꽃은 새끼손가락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아 잘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 얼굴을 들이박고 오래, 자세히 바라본다. 작은 꽃잎 안에는 고양이 눈 같은 꽃밥이 박혔다. 4~5월 초봄 천마산 계곡 축축한 바위에 붙어서 자란다. 괭이눈의 꽃말은 ‘골짜기의 황금’ 그리고 ‘변하기 쉬운 마음’이다.

골짜기의 황금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둡다. 서둘러 발걸음 옮기는데 이름 모를 풀이 바짓가랑이 붙잡았다. 털어내려는 찰나 너도 이름이 있겠다 싶어 어둠 속에서 출석부 책장 넘겼다. 마지막 인연의 이름은 멸가치. 사람들이 바지에 덕지덕지 붙으면 무심하게 털어내 버리는 ‘가치 없는 풀’이라고 해 멸가치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다. 이름 듣고 나니 괜스레 미안하다. 산과 들 음지의 습한 곳에서 주로 자라고 꽃은 8~9월에 핀다고 한다. 여름에 다시 만날 인연이기를 기약하며 출석부 덮었다.

도움말=숲 해설가 이종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