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 -2016년 1월 6일

[북한읽기] 北에 끌려 다니며 '모' 아니면 '도'만 외쳤다

최만섭 2016. 3. 7. 11:35

[북한읽기] 北에 끌려 다니며 '모' 아니면 '도'만 외쳤다

  •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수은 북한·동북아연구센터 소장)

입력 : 2016.03.07 03:00

北 김정은의 竝進 정책 압도할 삼진·사진의 多進 정책 필요
효율적 경제 제재 강화하고 개혁개방 지원해 변화 촉진해
새로운 상상력·추진력 바탕한 北 비핵화 신외교 모색해야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수은 북한·동북아연구센터 소장)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수은 북한·동북아연구센터 소장)
'수없이, 수없이라는 말이 sad, sad처럼 들릴 때가 있다'(최승자 시 '구석기 시대의 구름장들' 일부). 지난 몇 주, 이 짧은 구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 처음으로 북핵 위기가 불거진 1990년대 초반 이후 우리의 대북정책은 수없이 실패해 왔고, 우리는 지금 슬픈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핵을 머리에 이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토록 되뇌었건만, 오히려 그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한층 강화됐다. 남북관계는 초보적인 대화와 협력마저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해 다방면에서의 교류 확대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지금 교류되는 것은 서로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전단과 방송뿐이다.

한국전쟁 이후 끊어졌던 남북관계가 1988년 '7·7 선언'을 계기로 재개됐다. 북한을 단순한 적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동반자로 규정하면서 그전까지는 불법이었던 북한과의 교류 협력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북관계는 1988년 상황으로 돌아간 셈이다.

'7·7 선언' 이후 역대 우리 정부 대북정책의 목표는 동일했다.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 국가로 유도하고, 평화와 통일의 기반을 닦겠다는 것이었다.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평화 정착, 북핵 문제 해결, 북한 개방 유도, 경제 협력 확대, 이산가족 상봉, 사회문화 교류 추진 등은 모든 정부의 과제였다. 다만 정부의 성향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랐고,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대북정책은 실패했다. '햇볕'을 쬐어도, '강풍'을 불어도 북한은 변화하지 않았다. 실패의 근본적인 이유는 비정상의 길을 고수하는 북한의 행태 때문이었지만, 우리의 대북정책이 단선적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포용 일변도였거나 압박 일변도였단 뜻이다.

포용으로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없으니, 점점 더 큰 '퍼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 성사를 위해 뒷돈을 주었고, 핵실험에도 아무 일 없는 듯 모든 경협을 지속했다. 압박으로 효과가 없으니 제재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웬만한 제재로는 안 되니 개성공단 중단 같은 초강력 제재까지 동원해야 했다.

어느 정부든 단선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애초에 포용 혹은 제재만으로 성과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지난 20년 대북정책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국제사회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전략적 인내'라며 무시와 제재 정책을 펴 온 미국도 실패했고, '전략적 자산'이라며 지원과 포용 정책을 실시해 온 중국도 북한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게다가 단선적인 정책으로는 북한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핵실험에 '따른' 대응 방안을 만들고, 미사일 발사를 하면 또 그에 '따른' 대응 방안을 수립한다. 매번 수세적인 입장이다. 국면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고, 그저 북한이 조성한 국면에 대응할 뿐이다.

이제는 단순한 포용과 제재를 넘어서는 복합 정책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김정은의 북한은 병진(竝進)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단선의 일진(一進) 정책으로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 병진을 효과적으로 압도하려면 삼진, 사진의 다진(多進) 정책이 있어야 한다.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의 제안처럼, 효율적 경제 제재의 강화, 대북 비핵 신안보체제의 구축, 개방개혁 지원을 통한 변화 촉진, 북한 비핵화의 신외교 모색이라는 복합 해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운 상상력과 정책적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아직 냉전이 끝나기도 전인 1988년 남북관계와 한국 외교의 놀라운 이정표를 만들어 낸 '7·7 선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이 30여년 전의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그래서 나지막이 불러본다, 응답하라 1988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