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에 집사람이 애호박을 무채처럼 썰고 돼지고기를 잘게 다진 뒤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만두소로 만두를 만들었다.
집사람은 냉동실에서 살짝 얼린 삶은 만두 한 접시를 담아 미지근한 물에 살짝 데쳐 내게 내밀었다. “당신의 무더위를 단숨에 날려 드리겠어요!”적당히 얼려진 호박을 씹을 때마다 입속에서 얇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치 청정한 약수가 내장으로 흘러가는 듯한 시원함을 만끽했다.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음식은 일종의 향수다. 나와 집사람은 이 감칠맛을 팔순이 넘은 장모님과 나누기 위해서 만두 한 사발을 싸서 처가로 향했다.
텅 빈 냉장고에는 작은 김치 통과 약수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냉장고의 공간과 건강은 비례하는 것일까? 장모님은 아직도 정정하시다.
미국인들의 냉장고에는 공간이 없다. 그들의 냉장고에는 물 대신 마시는 콜라와 사이다 그리고 냉동시킨 양고기와 치킨, 냉동 고기를 요리하기 위한 각가지 향료와 소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많은 미국인이 당뇨와 고지혈증 등 영양 과다로 인한 현대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이러한 음식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흔히 곱게 늙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는 심심산골에 흐르는 물같이 자신을 낮추고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본 행복한 사람들, 혼신의 힘으로 자기가 맡은 소임을 이행하면서 인간의 본연적인 고독과 허무를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장인(匠人)이나, 항상 ‘인생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수도승은 ‘무엇을? 언제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용기와 능력(?)이 탁월하다.
미국인들의 바람직한 인간상이 서부 개척 시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젊은이라면 동양인들이 그린 이상적인 인간은 노자(老子)와 같이 속이 확 트인 늙은이이다.

노자(기원전 571~기원전 471 추정)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상선약수,수선리만물이부쟁,처중인지소오,고기어도)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무위자연의 도의 모습과 가까운 것이다.'- (노자(老子) 제8장,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우리 집사람은 늘 내게 말한다. "우리 엄마는 복 받은 노인네야!" 기력이 쇠약해진 노인에게 호의호식은 오히려 독일 될 수가 있다. 지혜로운 늙은이는 항상 자기 몸과 마음을 가볍게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적당히 섭취하고 몸을 깨끗이 하고 청결한 옷을 입고서 편안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준비한다.
네 명의 딸들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서 진찰까지 받게 해 드리니 머지않아 이 세상과 이별할 노인에게 이보다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장모님은 매우 불행한 분이다. 당신은 아직도 밤새 낙엽 지는 소리에 삶과 죽음을 들락날락할 만큼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손녀들을 돌봐야만 하는 가난한 가장이다.
장모님도 한때는 드넓은 전답을 소유한 부농이었으나, 외동아들이 사업실패로 전 재산을 말아먹어 알거지 신세로 전락하여, 골목에서 폐지를 줍고 이웃집 허드렛일하면서 손녀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매달 초마다 집세와 전기세가 밀려서 집주인에게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장모님께서 당신의 팔자를 원망하거나 못난 아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다.
당신의 말씀대로 평생 단 한 번의 과식도 해본 경험이 없는 장모님의 전생은 아마도 몸과 마음을 갈고닦던 수도승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에 딸들이 고향 근처에 장모님이 거처할 13평짜리 임대 아파트를 마련해 드린 것이다.

"효(孝)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실할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 deed)"라는 미국 속담이다.
몇 년 전 만취한 초등학교 동창이 갑자기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생뚱맞게 대학생인 우리 아들에게 물었다. “효(孝)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주뼛대면서 아들 애가 대답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칭찬을 기대했던 모범생, 아들 녀석은 낯선 어른의 핀잔과 함께 이해가 되지 않는 효에 대한 정의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야! 효(孝)는 부모님이 수족을 쓰지 못할 때 삼 년간 수발을 들어 드리는 거야!."
나는 불효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삼 년 전에 당신의 수의를 손수 장만하셨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자손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야속하게만 생각했을 뿐, 그동안 어머니가 느꼈을 뼛속까지 스며드는 처절한 쓸쓸함과 허망함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왜 늙고 병들어서 상여 나가는 곡소리에 서러운 눈물을 흘릴 만큼 심약해진 어머니를 그토록 냉정하게 외면했을까?
지난달에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효(孝)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아파트 위층에 부모를 모시고 살았던 이 효자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세 며느리를 불러 모았다. “가세가 빈곤하여 너희에게 작은 유산조차 물려주지 못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염치조차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내 마지막 유언이니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너희 셋이 닷새 씩 내 수발을 들어다오.”

아버님은 식음을 전폐하시고 15일간을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하여 세명의 며느리와 가족은 교대로 아버지 곁을 지켰다.
오랜 병상 생활로 인하여 침대 매트리스와 맞닿는 등짝에 생기는 등창을 예방하기 위해서 집안 식구들은 교대로 서너 시간씩 간호를 하면서, 아버지의 누운 자세를 고쳐 드려야만 했는데, 그 긴 보름 동안 대학교 다니는 딸애가 할아버지의 온몸을 정성껏 씻겨 드렸다고 한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내 딸이지만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어! 불현듯 시집가면 시댁 어른들에게 사랑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세상 사람들은 효(孝)는 더 이상 훌륭한 배필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마음씨 곱고 효심이 지극한 처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를 마친 후,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며느리들을 불러 모은 것은 세 아들 부부가 우애를 돈독히 해야만이 집안이 화목할 수 있다는 당신의 절실한 심정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으셨다는 생각이야! "
이 효자는 아직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위층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잔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효(孝)는 경제력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효(孝)에는 세속적인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다. 만일 성공하고 출세해서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는 것이 효(孝)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마치 냉장고를 간편식으로 가득 채우는 행위와 같다. 냉장고를 적당히 비워둔 사람들의 특징은 신선한 식재료를 섭취하고, 몸과 마음을 가볍고 건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효(孝)는 부모와 자식 모두 마음을 비우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효(孝)란 아들과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인으로서 수도자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부모님에게 용기를 북돋아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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