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탄생 100주년

정주영 탄생 100주년(1915.11.25)

최만섭 2015. 11. 25. 09:55
정주영- 탄생 100년    2015/11/25 09:20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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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불같은 도전…

그의 '돌관 정신' 되살려라

  • 입력 : 2015.11.25 02:02 | 수정 : 2015.11.25 08:26

[정주영 1915.11.25~탄생 100년]
시련의 한국경제에 던지는 '정주영의 5가지 메시지'

첫 쌀가게도, 정비社도 망해… "시련 있어도 실패 없다" 再起
전경련건물 옥상에 방공포대, 서산 간척 땐 '유조선 공법'
소 1001마리 끌고 訪北도… 세계가 깜짝 놀란 '역발상'

정주영 탄생 100년 기사 로고 이미지

정주영이 만든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은 계열사 98개에 종업원 21만2700여명(2014년 기준)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범(汎)현대가 기업이 지난해 올린 매출 합계는 235조원으로 우리나라 GDP (국내총생산)의 14%에 해당한다. 그런 정주영의 삶에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푸는 해법이 숨겨 있다. 그의 출발은 빈손이었고 그가 달려온 시간은 위기 아닌 순간이 없었다.

1.시련과 실패를 이겨내

정주영의 삶은 얼핏 성공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은 무수한 실패와 시련으로 점철됐다. 첫 사업체였던 쌀가게 운영은 1년 만에 일본의 쌀배급제 실시로 문 닫았다. 빚을 내서 시작한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는 문 연 지 20여일 만에 전소(全燒)했다. 다시금 빚을 내 정비업소로 재기했지만 일본의 태평양 전쟁 도발로 '군수 물자 동원령(令)'이 내려져 폐업했다. 광복 후 세운 '현대건설'은 간판을 단 지 6개월 만에 6·25전쟁을 맞았고, 전쟁 직후 따낸 고령교 공사에서는 공사 대금보다 더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이두원 연세대 교수는 "정 회장은 어려움을 한번 이겨내면 더 큰 기회가 온다고 굳게 믿었던 신념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2.현장에서 답을 찾다

울산 현대조선소의 건설소장을 맡았던 임형택(79) 전 한라건설 부사장은 "정 회장은 일주일에 3~4일은 현장에서 살았는데 늘 오전 4시에 일어나 현장을 한 바퀴 돈 뒤 오전 5시에 직원들과 아침 먹으며 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직접 본 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인을 찾아내 해결책까지 만들어주며 직원들을 독려한 리더라는 것이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의 전략은 있으며, 그걸 찾으려면 현장에 가야 한다는 게 정주영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5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세계 굴지 기업을 키워냈다. ①정주영이 1980년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전시된 현대의 첫 독자 기술 자동차 ‘포니’(위)와 그리스로 수출한 26만t급 대형 선박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정주영의 역작으로 꼽힌다. ②1983년 고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 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함께 서울의 한 미술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③1980년대 강원도 강릉 현대호텔에서 열린 현대건설 여름 수련회에서 트럼펫을 불며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④집 앞마당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5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세계 굴지 기업을 키워냈다. ①정주영이 1980년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전시된 현대의 첫 독자 기술 자동차 ‘포니’(위)와 그리스로 수출한 26만t급 대형 선박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정주영의 역작으로 꼽힌다. ②1983년 고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 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함께 서울의 한 미술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③1980년대 강원도 강릉 현대호텔에서 열린 현대건설 여름 수련회에서 트럼펫을 불며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④집 앞마당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 /현대차 제공

3."시간은 평등한 자본금"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최악의 난구간(難區間)이던 당재터널(현재 옥천 터널) 공사는 준공식에 맞추려면 한 달 만에 끝내야 했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들은 최소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인력을 두 배로 지원하고 낮과 밤 모두 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현장 관계자는 "두 달짜리 공정표를 만들어서 한 달 만에 끝낸 '돌관(突貫) 정신'의 전형"이라고 했다.

정주영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며 나는 그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4."신문대학 나왔습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분이 어떻게 명문대 직원들을 잘 다루나"고 묻자, 그는 "신문(新聞) 대학을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신문에 글을 쓰는 문필가, 철학자, 경제학자가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임형택 전 부사장은 "그는 본인의 아이디어도 많았지만 배운 사람의 지식을 듣고 난 뒤 기업에 도움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최고였다"고 말했다.

5.상상력을 행동으로 실천

정주영이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직후였다. 20층짜리 회관 건립을 지시했더니 "인근 국회의사당에 배치된 수도방위사령부 방공포대가 시계(視界)를 가린다고 허가를 안 내준다"고 했다.

이때 정주영은 "포대의 시계를 가리기 때문이라면 포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준다고 하라"고 해결책을
내놨다. 결국 전경련은 20층짜리 회관을 지었고 포대는 전경련 옥상으로 옮겨 왔다. 서산간척사업 당시 '유조선 공법'이나 소 1001마리를 끌고 방북했던 것도 그의 상상력에서 나온 일들이다. 그는 1992년에 정계에 투신해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이후 자녀들의 후계 구도를 말끔히 정리하지 못해 '형제간 분란'이 생긴 것은 그의 삶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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