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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서정시대] 영혼까지 끌어모아 ‘숫자’에 올인하는 이들에게

최만섭 2022. 2. 10. 05:03

[김지수의 서정시대] 영혼까지 끌어모아 ‘숫자’에 올인하는 이들에게

입력 2022.02.10 03:00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뉴노멀의 시간을 통과하기 위해 ‘어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 쿼터(75~100세)를 살면서도 지적 폭발과 인격의 성장을 멈추지 않는 어른들에게선 지혜의 광휘가 일렁인다. 최근에 특히 네 어른 말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이어령 전 장관과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프랑스의 대문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영국의 경영 사상가 찰스 핸디가 그들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나는 이 중 세 사람을 인터뷰했고, 한 분은 책으로 만났다. 이어령 선생과는 사계절을 함께하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인터뷰집을 냈고,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으로 인연이 되어 만난 김형석 교수와는 최근 그의 책 ‘김형석의 인생 문답’에 추천사를 썼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쓴 파스칼 브뤼크네르와는 며칠 전 영혼에 자국이 남을 만큼 이메일로 깊게 교신했다.

손주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된 책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를 읽고는 찰스 핸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다국적 석유 기업에서 임원으로 오래 일한 이 경영 사상가의 가르침은 문인이나 철학자의 가르침에 비해 더 생활적이고 구체적이다. 피터 드러커가 왜 그를 ‘천재적 통찰력을 현실에 구현한 사람’이라고 치하했는지 이해했다.

3국 네 어른의 지혜가 내 안에서 뒤섞이고 재분류되는 과정은 황홀했다. 광활한 우주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시공간을, 탁자 위의 컵 하나로 정확하게 구획해내는 이어령 선생(컵은 육체, 그 안에 담긴 물은 욕망과 마인드, 컵 안의 빈 곳은 영혼), 그 유한하게 찰랑이는 고귀한 인간 100년의 경험을 동시대 사회 공동체와 더 넓게 ‘나누고 싶어 하는’ 김형석 교수, 프랑스 개인주의의 찬란한 정점에서 임종 전까지 욕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고 불 지피는 파스칼 브뤼크네르, 그리고 신의 공의를 공리적 전통으로 구현한 영국인답게 편지 21통으로 자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어긋난 균형을 맞추고, 생활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반듯하게 교정해주는 찰스 핸디가 있다.

그들의 지혜는 나고 자란 토양과 견문의 독자성만큼 달랐으나, 공통점도 꽤 있었다. 젊거나 늙었거나 호경기거나 불경기거나, 다가오는 삶(미래)은 문젯거리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행운이 숨겨진 기회의 덩어리라는 것. 그런데 이 미래라는 기회의 덩어리는 위험이라는 접착제로 뭉쳐있기에, 삶은 설루션의 연속체가 아니라 항구적 리스크 테이크라는 걸 인정할 때 비로소 ‘자아 발견의 여정’이 즐겁다는 것. 다행히 험난한 코너를 돌 때마다 리스크를 함께 질 동지들이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렇게 주기적으로 지난 시간(과거)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닥친 ‘행운’을 새록새록 ‘회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남는 장사’라는 것.

 

네 현자와 함께 인생이라는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난제인 돈과 일과 행복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돈은 일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걸지 말라고 어른들은 조언한다. 이어령 선생은 올림픽 행사처럼 돈 안 받고 일할 때 가장 신이 났다고 했다. 김형석 교수는 돈 때문에 한 강연은 그거로 끝이 나지만, 돈이 적어도 가치가 있어 한 일은 또 다른 일을 물고 오더라고 했다.

찰스 핸디는 ‘워라밸’이라는 조어를 지적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삶과 더 적은 일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일을 더 적절하게 조합하는 것이라고. 찰스 핸디 부부는 노년에 이르렀을 때, 1년을 절반으로 나눠 6개월은 남편이 사진가인 아내의 전시회를 돕고, 6개월은 아내가 남편의 강연 매니저로 일했다. 주말 아침은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봉사 시간으로 썼다.

재밌고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더 많은 기회와 행복이 찾아온다고 마지막 쿼터에 이른 분들은 아름답게 합창했다. 까칠한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조차 “우리는 악몽을 관통하고 보물을 받았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고 했다.

엊그제 종잇장처럼 마른 채 침대에 누워 계신 이어령 선생을 뵙고 왔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그의 고백에 화답하듯 머리맡에 놓인 선물들이 화사했다. 노학자의 침대를 흰 별과 눈의 오르골이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