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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63] 서시(序詩)

최만섭 2022. 3. 28. 05:18

[최영미의 어떤 시] [63] 서시(序詩)

입력 2022.03.28 00:00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1952~)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는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이 거리는 내게 낯설다.

그는 공감각적 심상에 아주 능한 시인이다. 2연의 3행을 보라. ‘새소리’(청각)가 ‘번쩍이며’(시각) 흘러내리고… ‘몸 뒤트는 풀밭’이라니. 참으로 창의적이며 애절한 묘사 아닌가. 그의 시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감정을 이토록 새롭게 역동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사랑을 갈구하는 불안한 청춘의 어느 저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