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WEEKLY BIZ] “대기업, 정치사회 이슈서 손떼라”

최만섭 2022. 6. 10. 05:21

[WEEKLY BIZ] “대기업, 정치사회 이슈서 손떼라”

[Cover Story]
美보수 “인종·성소수자·환경문제 착한 척 말라” 워크 자본주의에 반격

입력 2022.06.09 21:00
 
 
 
 
 
일러스트=양진경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70년 주창한 ‘주주 자본주의’는 수십년간 미국 기업 경영의 표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소득 양극화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부상했다. 기업이 주주뿐만 아니라 고객, 공급자, 직원,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 관계자의 이익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가 가세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 경영의 새로운 대세가 됐다. 컨설팅 기업 에델만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 전 세계 소비자 3만3000명 중 86%는 ‘CEO가 사회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진보 진영으로부터 사회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미국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인종, 성소수자, 환경 문제 등 각종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보수 진영이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진보적 대의를 지지하는 미국 대기업들의 경영 행태를 ‘워크(Woke·깨어 있는) 자본주의’로 명명하고, 대대적인 ‘안티 워크(anti-woke)’ 운동을 벌이고 있다. 워크는 원래 ‘인종·성별 등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깨어 있다’는 의미로 널리 쓰였으나,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워크 자본주의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진보적) 기업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이 주주총회와 의회, 언론 등에서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고 했다.

◇멀어지는 공화당과 대기업

안티 워크 운동을 이끄는 건 미국 보수 세력의 중심인 공화당이다. 전통적으로 미국 공화당은 법인세 감면과 규제 완화 등 친(親)기업 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2020년 ‘BLM(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과 대선을 거치며 공화당과 기업 사이의 거리는 급속도로 멀어졌다. 여론조사기관 갤럽 조사 결과 지난해 공화당원들의 대기업에 대한 순신뢰도(’아주 신뢰한다’에서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를 제외한 응답)는 -17%로 1년 전(13%)보다 30%포인트 하락했다. 갤럽이 조사를 시작한 1973년 이후 최저치다. 특히 빅테크에 대한 순신뢰도는 12%에서 -29%로 1년 만에 41%포인트 곤두박질쳤다. 갤럽은 “대형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선거와 팬데믹에 대한 특정 콘텐츠를 차단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폐쇄했다는 이유로 보수 진영의 질책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벌어진 조지아주 선거법 개정 사태는 공화당의 안티 워크 운동에 불을 붙였다. 조지아주 의회와 정부가 공화당 주도로 부재자 투표 요건을 대폭 강화하는 선거법을 통과시키자 민주당은 “흑인과 저소득층의 투표 참여를 어렵게 만든다”며 반발했다. 코카콜라와 델타항공 등 조지아주에 본사를 둔 기업들도 여론을 의식해 선거법 개정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올스타전 개최지를 조지아주에서 콜로라도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공화당은 공격적인 수단을 동원해 강하게 반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은 대대적인 코카콜라 불매운동을 벌였다. 또 델타항공이 받았던 3500만달러(약 437억원) 세금을 아낄 수 있는 감세 제도를 철회하거나, MLB가 한 세기 가까이 누려온 독점금지법 특별 면제를 폐지하려고 시도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대기업들이 깨어있는 유사 정부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기업들이 헌법 질서에서 벗어나 극좌의 무기가 된다면 심각한 대가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월트디즈니에 강경 대응 -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지난 4월 월트디즈니의 특별지구 지위를 박탈하는 법안에 서명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 동성애 등 성 정체성 교육을 금지하는 플로리다 주정부 방침에 월트디즈니가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자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AP 연합뉴스

최근엔 월트디즈니가 성소수자 문제로 공화당과 대립하고 있다. 디즈니월드가 위치한 플로리다주는 지난 3월 공화당 소속의 론 드샌티스 주지사 주도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생에게 동성애 등 성 정체성에 대한 교육을 금지시키는 ‘부모의 교육권법’을 제정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강화한다는 진보 진영의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디즈니는 당초 이 법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의 침묵에 대해 직원들이 파업과 항의 시위에 나서자 밥 체이펙 CEO가 “기업의 영향력을 공익을 위해 행사하겠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 플로리다주에 대한 모든 정치자금 기부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자 드샌티스 주지사는 “디즈니가 선을 넘었다”며 디즈니에 대한 혜택을 박탈하는 법안을 처리할 것을 주 의회에 요청했다. 내년 6월부터 디즈니월드의 특별지구 지위가 박탈되면서 디즈니는 수천만 달러의 재정적 손실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투자업계도 ‘안티 워크’

정치권뿐만 아니라 투자업계에서도 워크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안티 워크를 표방하며 지난달 설립된 신생 자산운용사 ‘스트라이브(Strive)’는 기업들이 정치적 이슈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페이팔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 억만장자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캐피털 회장 같은 거물들이 스트라이브에 2000만달러(약 250억원)를 투자했다. 스트라이브 대표 비벡 라마스와미는 혁신 바이오 기업인 로이반트를 창업하고, 지난해 워크 자본주의를 비판한 저서 ‘워크 주식회사(Woke Inc)’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인물이다. 라마스와미는 “대부분의 미국인은 기업이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문제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기업들이 정치적 어젠다보다 고객에게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기업 이사회에서 다른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지난 4월에는 주주 제안 방식으로 워크 자본주의에 제동을 거는 보수주의 투자자 연합 ‘보드룸 이니셔티브(Boardroom Initiative)’가 출범했다. 베스트바이 전 CEO인 브래드 앤더슨과 맥도널드 전 CEO 에드 렌시가 공동 의장을 맡았다. 렌시 의장은 “기업이 정치적 논쟁에서 특정한 진영을 편들면 주주들에게 피해를 준다”며 “수십억 명을 빈곤에서 구출하고 전 세계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책임이 있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 시스템이 공격받고 있다”고 했다. 출범 후 첫 활동으로 보드룸 이니셔티브는 뱅크오브아메리카 주주총회에서 직원에 대한 인종 교육 강요에 반대하는 주주 제안을 제출했다.

이 연합에 참여한 비영리기구 ‘세컨드보트’ 역시 몸집을 불리며 영향을 키우고 있다. 세컨드보트는 자산운용사 릿지라인을 통해 정치 문제에 중립적이거나 보수적인 기업에만 투자하는 ‘미국 보수적 가치 ETF(ACVF)’를 운용하는데, 작년 5월 1030만달러(약 128억원) 수준이던 ACVF의 총 운용 자산은 1년 만에 3192만달러(약 398억원)로 늘었다. 세컨드보트는 “대부분의 펀드나 ETF가 진보적 어젠다를 지지하는 회사를 보유하고 있다”며 “ACVF는 기업의 활발한 정치 활동이 수익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에 기초해 투자한다”고 했다.

 

올해 초 ‘영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펀드매니저 테리 스미스는 소비재 대기업 유니레버의 워크 자본주의 행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90억파운드(약 45조원)를 운용하는 스미스의 펀드스미스는 유니레버의 10대 주주 중 하나다. 유니레버의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스는 지난해 “회사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서 아이스크림 판매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스미스는 투자자 연례서한에서 “유니레버는 사업 펀더멘털을 희생하면서 지속 가능성을 과시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며 “벤앤제리스 사건은 회사가 이윤보다 목적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명백한 사례”라고 했다.

◇ESG 반발도 확산

팬데믹을 계기로 경영 및 투자의 새 트렌드로 자리 잡은 ESG 역시 안티 워크 운동의 주요 공격 대상이다. 펀드평가사 모닝스타에 따르면 ESG에 초점을 맞춘 펀드와 ETF(상장지수펀드) 자산 규모는 2019년 1조7240억달러(약 2159조원)에서 지난해 2조7000억달러(약 3380조원)로 56% 증가했다. 안티 워크 진영은 기업과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ESG 준수 여부에 따라 투자가 결정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은 ESG를 중국 공산당이 국민에게 부여하는 사회 신용 점수에 비유하며 “ESG 점수가 낮은 회사는 자본 조달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해한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평가사마다 다른 ESG 기준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지난달 테슬라가 S&P500 ESG 지수에서 제외되자 ESG를 ‘사기’라고 비난했다. S&P 측은 테슬라의 열악한 근로 환경과 인종차별 보고, 저탄소 전략 부족 등을 제외 이유로 밝혔다. 그러자 머스크는 “(석유 기업인) 엑손 모빌은 ESG 순위 10위권에 올라있는데, (친환경 기업인) 테슬라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며 “ESG는 사회 정의 전사들에 의해 무기화되었고, 기업이 좌파 의제를 얼마나 준수하는지에 따라 점수가 결정된다”고 했다.

에너지 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주정부들도 ESG에 반기를 들고 있다. 대형 은행과 신용평가사들이 주정부의 신용도를 평가하면서 대차대조표 외에 ESG 요소까지 활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이다호주는 최근 S&P글로벌에 “주정부 평가에 정치적인 등급제를 채택하고 있다”며 항의 서한을 보냈다.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에 맡긴 돈 중 2000만달러(약 251억원)를 올해 초 인출했다. 라일라 무어 웨스트버지니아주 재무장관은 “에너지는 우리 주에 수억달러 세수를 제공하고, 모든 일자리 역시 석탄과 가스에서 나온다”며 “이를 ‘나쁜 산업’으로 규정하는 것은 실존적인 위협이며,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와 켄터키주, 텍사스주는 금융 회사가 석유·가스·석탄 회사와의 거래를 제한하는 정책을 갖고 있는지 밝히도록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의를 제기하는 은행은 해당 주에서 사업 면허를 잃을 수 있다. 다른 12개 주도 유사한 조치를 고려 중이다.

안티 워크 운동의 최대 목표는 ESG 투자를 선도하는 블랙록과 뱅가드, SSGA(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 등 빅3 자산운용사들이다. 이 세 회사는 현재 미국 ETF 자산의 75% 이상을 운용하고 있다.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은 최근 CNBC에 “블랙록과 같은 워크 자본주의가들이 정치적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장을 남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수 성향 소비자단체 컨슈머리서치는 지난해 블랙록을 비난하는 수백만달러 규모의 TV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컨슈머리서치는 “블랙록은 미국 기업에 ESG 표준을 적용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에는 ‘워크 어젠다’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안티 워크 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올해 연례 서한에서 “(블랙록이 추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정치나 사회적, 이념적 의제가 아니며 ‘워크 자본주의’도 아니다”며 “직원과 고객, 공급업체 및 지역사회 간 상호 유익한 관계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치 고아’ 된 미국 기업들

안티 워크 세력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미국 기업들은 정치 양극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성소수자 이슈로 홍역을 앓았던 월트디즈니 밥 체이펙 CEO는 주주총회에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체이펙 CEO는 주주들에게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어떤 입장을 정하는 것은 마치 바늘에 실을 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호소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업들이 점점 더 정치적 고아가 되어가고 있다”며 “공화당의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민주당은 좌경화되면서 재계가 우군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평했다.

워크 자본주의에 대한 CEO들의 입장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다. 지난해 포천지가 포천500 기업 CEO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CEO는 중요한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책임이 있고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응답과 ‘CEO가 최근 사회·정치적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어 물러설 필요가 있다’는 응답이 50대50으로 갈렸다. 빌 조지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는 “CEO들은 복잡한 정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지만, 목소리를 내든 침묵을 지키든 비판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했다.

워크(woke) 자본주의

미국 보수 진영에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메시지를 내는 기업들의 경영 방식을 비판하면서 만든 신조어. 워크(woke)는 사전적으로 ‘깨어 있는’이라는 뜻이지만, 최근엔 미국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의 선민의식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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