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종두법 선구자들은 모두 당쟁에 휘말려 역사에서 사라졌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최만섭 2022. 6. 8. 05:21

종두법 선구자들은 모두 당쟁에 휘말려 역사에서 사라졌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4. 지석영보다 80년 먼저 종두법을 개발한 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구내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있는 지석영 동상. 1880년 일본으로부터 우두법과 근대 의학을 도입한 인물이다. 우두법이 도입되기 전 1800년 북학파 학자 박제가와 의사 이종인은 정약용과 함께 천연두 환자 고름을 이용한 인두법을 연구해 접종법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은 개발 이듬해인 1801년 역모와 천주교 신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유배형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인두법 또한 종적을 감췄고, 조선을 500년 동안 괴롭혔던 마마 퇴치는 근 100년을 더 기다려 지석영에 의해 치료되기 시작했다. /박종인 기자
입력 2022.06.08 03:00

죽거나 박색으로 살거나

조선 시대 ‘두창(痘瘡)’이라고 불렸던 천연두는 호랑이와 함께 조선 백성을 괴롭혔던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걸리면 죽었다. 죽지 않고 살아나면 눈이 멀어서 ‘눈 먼 사람 가운데 십중팔구는 원인이 천연두였고’ 얼굴이 곰보로 변해버려 ‘하늘이 내린 미용을 하루아침에 잃게 하는’ 끔찍한 병이었다.(지석영, ‘우두에 관하여’, 황성신문 1903년 3월 24일)

태종 이방원 아들 성녕대군 이종도 열세 살에 천연두로 죽었다.(1418년 2월 4일 ‘태종실록’) 숙종 때인 1677년부터 1683년까지 한성에 천연두가 대유행해 숙종 본인도 천연두에 걸려 고생했다. 추한 용모를 뜻하는 ‘박색(縛色)’은 그 단어 자체가 천연두에 걸리면 그 자국으로 얼굴이 얽어버려서(縛: 얽을 박) 생긴 말이었다.(1738년 7월 3일 ‘영조실록’) 현존하는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 180여 폭 가운데 초상화 주인공 16명 얼굴에 곰보 딱지가 그려져 있으니, 비교적 신분이 높은 사대부들도 열 가운데 한 명은 천연두를 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김호, ‘조선후기 ‘두진’ 연구’, 한국문화 17호,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96)

그 무시무시한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소멸했다. 제1공신은 1796년 우두법을 개발한 영국인 제너다. 조선에서 제1공신은 지석영이다. 1880년 지석영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수입한 우두법이 서서히 전국에 보급되면서 조선인은 호환 마마 가운데 마마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연두에 걸린 소 고름을 쓰는 우두법이 수입되기 전, 조선에서는 천연두 환자 고름을 사용한 ‘인두법’이 한때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천연두 환자를 성 밖 초가에 격리시키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속수무책의 조선에 희망을 싹 틔운 사람들이다. ‘인두법’을 개발한 이 선구자들 이름은 박제가, 이종인 그리고 정약용. 공통점이 또 있다. 이들은 개발 직후 인두법을 보급하기도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형을 당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금 더 일찍 조선에서 천연두가 사라질 수 있었던, 아쉬운 이야기.

천연두와 함께 조선을 500년 동안 괴롭혔던 호환(虎患). 식민시대 총독부는 ‘유해 동물 퇴치(害獸驅除·해수구제)’ 사업을 통해 궁궐과 민가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던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 결과 호환(虎患)도 치료됐지만 호랑이는 멸종됐다. 사진은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민화. /국립중앙박물관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4. 지석영보다 80년 먼저 종두법을 개발한 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천연두 귀신이 만든 곰보

동서를 막론하고 17세기까지 홍역(麻疹·마진)과 천연두(痘瘡·두창)는 구분되는 병이 아니었다. 증세가 비슷한지라 대처하는 방식도 구분이 없었다. 앞에 언급한 성녕대군 사인도 정확하게 천연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술과 무속의 시대, 사람들은 신과 귀신에 의지했다. 숙종 때 장희빈 사건에 연루된 궁녀 숙영은 비단 옷감에 ‘두신(痘神·천연두 귀신)’ 이름을 적어 벽에 끼워 저주를 했다고 자백했고(1701년 9월 26일 ‘숙종실록’), 훗날 영조로 등극한 세자 연잉군이 마마를 앓고 치유되자 “임금이 짚으로 천연두 귀신을 만들어 떠나보냈다(送神·송신)”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711년 11월 24일 ‘숙종실록’)

스스로 합리적이라 믿었던 성균관 유생들은 “역병이 돌면 무지한 백성은 귀신 탓을 하지만 목숨은 귀신 마음이 아니라 운명에 달린 것”이라고 상소를 하기도 했다.(1544년 12월 21일 ‘중종실록’) 그런데 귀신을 혐오한 이 유생들은 이리 결론을 내렸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 속 오물과 고혈 찌꺼기가 밖으로 나와서 두창이 되는 것이다.” 결론에서 보듯, 역병에 대한 그 성리학적 결론은 너무나도 성리학적이었다.

‘동의보감’ 저자 허준 또한 두창의 원인을 ‘태독(胎毒)과 운기(運氣)’로 규정했다. 그래서 허준은 갓난아이가 배 속에서 받은 독 기운이 바깥 독기를 만나면 천연두에 걸린다고 판단하고 ‘쓴 약물로 아기 입을 씻고 탯줄을 태운 재를 먹여’ 태독을 제거하면 증세가 완화된다고 처방했다.(허준,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上, 해독면두방(解毒免痘方): 오재근, ‘조선 의관 허준의 두창 의학과 변증(辨證)’, 의사학 30권1호, 대한의사학회, 2021, 재인용) 1752년 영조 때 의사 임서봉은 마진(홍역)에 대해 ‘野人乾(야인건)’을 특효약으로 처방하고 ‘회충을 조심하라’고 부기했다. 야인건은 ‘말린 사람 똥’을 뜻한다.(임서봉, ‘홍진경험방’, 1752: 김호, ‘다산 정약용의 종두법 연구’, 민족문화연구 72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재인용) 똥은 열을 낮추는 효과는 있었지만 치료는 불가능했다.

전·현직 관료와 의사의 협업, 인두법(人痘法)의 탄생

시작은 동시다발적이었다. 1800년 규장각 검서관 초정 박제가가 규장각에 근무했던 전 형조참의 정약용을 찾아왔다.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던 때였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통해 상공업 및 무역 진흥을 주장한 북학파였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봉 문제로 구설을 피해 고향인 경기도 마현에 은둔 중이었다.(정약용은 박제가가 검서관이라고 기록했지만, 1800년 박제가는 이미 경기도 영평현령(포천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사상 통제로 거시적인 개혁 주장이 잠수해버린 그때, 정약용은 바로 이 천연두 퇴치법을 연구 중이었다. 이미 정약용은 “풍속에서는 똥을 즐겨 써서 병이 있으면 빈번히 똥을 썼으나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며 ‘마과회통’(1798)이라는 마진과 두창 의서를 저술해놓은 터였다.(김호, 1996) 정약용은 “한 해의 운수(운기·運氣)라는 것이 어떻게 천연두를 일으킨다는 말인가”라고 기존 처방을 비판했다.(정약용, ‘마과회통’, 운기(運氣))

박제가가 방문했을 때 정약용은 ‘종두방(種痘方)’이라는 청나라 천연두 의서를 탐독 중이었다. 책에는 “천연두 환자 고름딱지를 처리해 그 즙을 코에 넣으면 치료가 된다”는 ‘인두법(人痘法)’이 적혀 있었다.

몇 페이지가 달아나고 없는 이 책을 박제가가 보았다. “나한테도 비슷한 책이 있다.” 박제가가 보내준 책과 이 책을 합치고 정약용이 주석을 붙여 책이 완성됐다. 그 책을 포천군수 박제가가 읽고선 “여름과 겨울에 유효기간이 다르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박제가가 희소식을 전해왔다. “관아 이방(吏房)이 흥분해 종두를 자기 아이에게 접종하고, 관노가 자기 아이에게 그리고 내가 조카에게 접종하니 쾌차하였다.”

임상시험이 완료된 그 종두를 포천에 사는 이종인이라는 의사가 포천 남쪽 한성 이북 선비들에게 접종해 큰 성공을 거뒀다.(이상 정약용, ‘여유당전서’, 문집 10, ‘종두설(種痘說)’) 포천에서 박제가와 협업했던 의사 이종인은 의서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해 민간에 인두법을 보급했다(이종인 또한 정약용 기록과 달리 박제가와 협업 시기를 1798년이라고 기록했다).

3인의 협업이었다. 영국인 제너가 우두법을 내놓고 4년 뒤, 이 인두법이 나옴으로써 우두법보다 효과가 떨어지고 부작용도 컸지만 천연두 귀신에 기대던 전 근대적 치료법이 폐기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1800년 영평현령 시절 의사 이종인과 함께 종두법을 연구해 접종에 성공한 박제가. 이방과 관노 자식 그리고 자기 조카에 종두를 접종해 천연두 예방에 성공했다. /실학박물관

당쟁과 박해, 눈송이처럼 사라진 종두법

이들이 인두법 임상 시험을 완료한 1800년 6월 정조가 죽었다. 다음은 정약용이 남긴 기록이다.

‘이해 임금이 승하하였다. 다음 해 봄에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정은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간사한 놈이 의사 이씨를 모함하여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무고하니 의사 이씨가 고문받아 거의 죽게 되고 두종도 단절되었다.’

정조가 금지한 서학(西學)을 정약용이 신봉한다는 구실로 남인 박멸을 꿈꾸던 세력이 정약용에게 유배형을 내린 것이다. 박제가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의사 이종인 또한 천주교도로 몰아 고문을 가해 반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1807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정약용은 ‘상주에 사는 의사가 인두법으로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이들이 개발한 인두법이 차츰 퍼져나가 민간에서는 마마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엄격한 통제 속에서 제대로 된 의학 연구와 신의학 수입은 진흥되지 못했다. 1828년 유배에서 풀린 정약용은 1798년 탈고했던 ‘마과회통’을 증보편찬하면서 부록으로 ‘영국신출종두기서(英咭利國新出種痘奇書)’라는 청나라 소책자를 소개했다. 제너의 우두법이 청나라까지 전파된 과정을 소개한 책자다. 정약용은 이 책을 ‘신증종두기법상실’이라는 제목으로 첨부하면서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서양 지명과 인명, 연도를 지워버렸다. 언뜻 보면 서양인이 쓴 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권복규 등,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에 미친 천주교 세력의 영향’, 의사학 6권1호, 대한의사학회, 1997) 정약용은 마과회통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편집한 본방(本方)을 난리에 잃어버렸으므로 여기에 전말을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

그리고 1880년 지석영이 마침내 우두법을 도입해 조선팔도에 퍼뜨렸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종두법 실험장이 불타는 고난도 겪었지만 조선은 결국 천연두로부터 차츰 해방됐다. 학문과 사상 통제가 없었다면 많이 앞당겨질 수 있었던 해방이었다. 우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또한 1909년 12월 12일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한 혐의로 명예를 잃고 2003년 과학기술부 선정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5인에서 제외됐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